24년 2월 16일, 뉴욕 여행 중 작성한 글입니다
뉴욕에 오기 전, 엄마는 내가 이번 여행을 통해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벌써 뉴욕에 온 지 3주 차다. 엄마의 기대와는 다르게 1주 차에는 시차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썼고, 2주 차에는 함께 여행 온 동생을 미워했다. 그 틈을 타 익숙한 허무와 자기혐오에 빠졌다. ‘여기서도, 내 어두움은 여전하구나’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변할 수 있을까’ 엄마의 기대는, 나의 기대는 어느새 강박이 되어 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 날, 망설임 끝에 엄마에게 보이스톡을 걸어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예상한 대로 엄마는 어른으로서의 조언을 해주었고, 내 엉킨 감정은 시원하게 풀리질 못했다. 그래도 기억나는 말이 있었다. “너는 어렸을 때 흥도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지. 시간을 거치면서 무언가에 억눌린 것일 뿐, 그 밝음은 다른 먼 곳에 있지 않고 여전히 네 안에 있을거야”
허무감을 극복해보기 위해 전도서 강의를 찾아봤다. 전도서에는 두 가지 날개가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인생의 허무함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생이 선물이라고 한다. 당연히 나에게 와닿는 건 어차피 우린 모두 죽을 존재라는 첫 번째 지혜, “memento mori”였다. 하지만 전도서가 놓치지 않는 두 번째 지혜는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람들 만나는 모든 게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carpe diem” 즉 이 날을 붙잡고 이 날을 즐기라는 말 그대로, 오늘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이 모든 게 다 의미 없는 것 같을 때도, 결국 어떤 걸 경험해도 난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을 때도,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에 집중하고 지금을 누릴 수 있는데. 그러게, 그렇게 해봐야겠다. 첫째, 지금을 붙잡고 지금을 즐길 것. 둘째, 감사할 것.
며칠 전 픽사의 <소울>을 다시 봤다. 지구에서의 삶 자체를 거부하는 22호가 지금의 나와 닮아서 더욱 유심히 보게 됐다. 얼떨결에 조의 몸으로 지구에서 살게 된 22호는, 유 세미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지구에서의 다채로운 삶을 경험한다. 지구에 오기 전까지 링컨, 간디, 마더 테레사 등 수많은 위인 영혼들이 22의 멘토를 맡았으나 그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22에게 흥미를 느끼게 해준 것은 거창한 목표도, 원대한 꿈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다름 아닌 맛있는 피자 한 조각, 조그만 사탕 하나,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두 다리, 나무에서 떨어지는 조그만 낙엽 하나였다. 22는 지구에서 ‘삶으로써” 느꼈던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 자신의 불꽃 배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조는 그토록 바라왔던 재즈 밴드에 합류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난 후 조에게 남은 것은 벅찬 감동과 성취감이 아니었다. 조가 “What happens next?”라고 물어보자, 함께 공연한 도로시아는 “We come back tomorrow night and do it all again”이라고 답한다. 일생일대의 꿈도 막상 이루고 나면, 그저 일상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왠지 모를 허무함 속에 집으로 돌아온 조는 22가 주머니 속 넣어놓았던 사탕, 조그만 낙엽, 피자 조각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조는 꿈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가치라 생각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삶은 보잘것없게 될 거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삶을 되돌아본 조는, 자신이 음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음악은 “자신의 삶 자체”를 위한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하늘을 보는 게 제 불꽃이 아닐까요? 아니면 걷기!”
“그건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이렇듯 조와 22호가 영화 내내 찾아 나섰던 불꽃, 살아야 하는 이유는 특정한 목표도 목적도 아니었다. ‘살아내는 과정’ 그 자체에 있었다. 최근 전도서가 나에게 가르쳐준 지혜와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과거나 미래에 살기보다, 현재를 살아갈 것. 내가 이 세상에 그저 존재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할 것.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 것.
https://www.youtube.com/watch?v=npMVQr8gdaQ
나의 인생영화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월터는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지만 삶에 치이고 생계를 해결하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작아진 인물이다.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종 필요한 현실의 순간을 놓친 채 망상의 세계로 떠나곤 한다. 월터가 25번 사진을 찾아 떠나는 모험은 16년간 공동 작업을 해왔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한 숀 오코넬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평범함, 소심함, 책임감'의 상징하는 월터가 그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통해 모험심, 배짱, 독창성을 자신에게 채워나간다. 하지만 갖지 않은 새로움으로 자신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졌지만 잊고 있던 과거를 다시 일깨우고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여정이다.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 아이슬란드의 스케이트 활강 장면이다. 어릴 적 모히칸 머리로 스케이트를 타며 대회를 휩쓸었지만 아버지의 부재 이후 멀어진 스케이트 보드를 다시 타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르며 긴 내리막을 활강하는 장면은 꿈꾸며 약동하던 어린 시절의 힘을 일깨우고 되찾는 장면이다.
눈표범을 찍기 위해 히말라야로 향한 숀을 쫓아 히말라야까지 찾아간 월터는 드디어 숀을 만난다. 눈표범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아 '유령 표범'이라고 불리운다. 실재하지만 만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유령 표범. 25번 사진의 향방을 묻는 월터에게 그건 이미 자네가 갖고 있다며 자신이 선물한 지갑 안을 살피라고 한다. 하지만 월터는 아이슬란드를 다녀온 후 시련에 멍해질 때 지갑을 버렸다. 25번 사진을 못 찾게 되자 궁금함에 사진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월터의 질문에 "유령 표범처럼 아름다운 것, 월터 미티!"라고 대답하고 축구하러 가버린다. 그리고 드넓은 산맥 사이로 아름다운 석양이 펼쳐지는 가운데 사람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고서 모험을 마친다.
이런 월터의 모험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영화의 메세지는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모험을 떠나라!'가 아니다. '무미 건조한 일상을 상상으로 채워 실현케 하라!'도 아니다. 영화에 끝에서 밝혀지는 25번 사진의 정체는, 라이프지 회사 건물 앞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검수하며 열중하는 월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라이프지를 만들기 위해 헌신해온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경의와 헌사의 뜻을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월터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아가 평범함 속에 가려 그 실재의 아름다움, 유령 표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야를 한뼘 넓혀준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월터가 지금껏 살아온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을 떠나 실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에 휘둘리지 말고 당신이 두 다리를 딛고 있는 현실에 분명 실재하는 아름다움을 찾길 영화는 응원해준다. (출처; 나무위키 ㅎ)
다시 <소울>로 돌아와서, 환상적인 무대를 마치고 생각이 많아진 조에게 도로시아는 한 물고기의 이야기를 해준다. “한 작은 물고기가 있었어. ‘난 바다에 갈 거야’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큰 물고기가 말했어. ‘넌 이미 바다에 있는걸’. 그랬더니 작은 물고기는 말했지. ‘여기가 바다라고? 여긴 그냥 물일 뿐인걸’.” 우리가 그토록 찾는 바다, 불꽃, 행복, 의미, 아름다움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여기, 지금 나의 삶에 존재한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 존재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T_Wuzag6VU
이진아의 <여행의 끝에서>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로 글을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무심해진 날들이 희미한 꿈들이
늘어가는 한숨이 지새운 밤들이
반짝거렸던 눈빛이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누군가 툭 건드리면 막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내 안에만 감춰두고 싶어
이 어둠은 언제쯤 사라질까
이곳이 아니라면 다를 수 있을까
뉴욕에서 불어온 가을과
파리의 겨울 코트 끝자락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어
Could I meet another me
that I have never known
엿보고 온 세상의 틈새로 보았지
꺼지지 않을 듯이 빛나는 별들이
순수한 열정들이 내 마음을 툭하고 건드렸어
멈춰있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내 안에만 감춰두고 있던
어둠은 서서히 걷혀가고
Could I meet another me
that I have never known
돌아온 서울의 봄 내음과
늘 빛나던 한강의 여름밤
먼 곳에만 있는 줄 알았던
새로움은 여기에
내가 있는 곳에
여행의 끝에서 난 알 수 있을까
너와 함께라면
No It's not a burden
It's an invisible love
Every moment is a gift
https://www.youtube.com/watch?v=uOA4LZlY0zM
출처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나무위키
- 잘잘법 <허무함에서 벗어나는 법>
- 이동진&김이나 <소울> 랜선 GV
My spa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