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詩 여덟 편

정호승 선생님의 시 중 좋아하는 여덟 편을 모은 글입니다.

by hallieparker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감사하다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나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쥐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뜨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풀잎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을

그제서야 알고

감사하며 길을 걸었다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산을 오르며

내려가자 이제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끝까지 오르지 말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춘란도 피고 나면 지고 두견도 낙엽이 지면 그뿐

삭발할 필요는 없다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발자국을 남기지 말자

내려가는 것이 진정 다시 올라오는 일일지라도

내려가자 눈물로 올라온 발자국을 지우자

눈도 내렸다가 그치고 강물도 얼었다가 풀리면 그뿐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올라왔다


내려가자 사람은 산을 내려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산을 내려갈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강요당하지 말고

해방되기 위하여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가자 북한산에도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 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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