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13일 작성한 글입니다.
그녀(증조모, 삼천이)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나를 백정의 딸이라고 경멸하는 눈빛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 나는 상황이 변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경멸받고 싶진 않다.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중략) 사람들의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55-56p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증조부)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족은 사람인지. (중략) 부모와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그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61p
나(지연)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안정을 추구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독에 갇힌 나무처럼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립되었다. (중략)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298-299p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220p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314p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서는 있는 그대로를 감당하게 될 두려움과 아픔도 있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기만의 결과는 끝내 보면 더욱 참담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느끼고 싶지 않아서. 밑바닥을 만지기 싫어서. 미지근하게, 안전하게, 안정적이게 살아가기만을 계속 선택하다가는 화가 나고 슬픈 감정 자체가 버겁다. 심지어는 그런 스스로가 싫어서 자책한다.
나는 삼천이의 재능이 부럽다.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말이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
스스로를 속였던 영옥(할머니), 미선(엄마)과 지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말 몰랐던 증조부에게서 나를 본다. 사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증조부처럼 스스로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기대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종종 억울하고 화가 난다. 한편 영옥이나 지연, 미선처럼 삶 자체가 고달파서 사랑받기를 일찌감치 포기할 때도 있다. 영옥은 냉소로, 미선은 패배감으로, 지연은 미지근한 관계로 어떻게든 사랑의 부재를 견뎌보려고 했지만 결국 그 어느 것도 그들을 채울 수 없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의 시간을 견딜 수는 있었어도, 자신의 결핍과 포기는 가까운 이들의 결핍과 포기로 이어졌다. 나의 가시는 보통 가까운 이들을 찌르게 돼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상처는 되풀이되고 전승된다. 삼천은 영옥에게, 영옥은 미선에게, 미선은 지연에게. 일제강점기라서, 6.25전쟁이라서, IMF라서 등등.. 시대와 환경을 탓할 수 있겠지만 결국 각자의 세상이 있고 각자의 어려움이 있다. 이 끝없는 미움과 상처는 언제, 어떻게 끝날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삼천이의 재능에서,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새비 아주머니의 따뜻함에서, 묵묵히 뒤에서 지켜봐주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에서, 결국은 엄마로서 져주는 미선의 모성애에서, 엄마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본 지연이의 친절에서,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번 다가와준 할머니의 용기에서. 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디서든 우린 서로의 빛이 되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