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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위의 시간

by 한미숙 hanaya

나는 손목시계를 좋아한다. 젊은 시절부터 손목시계를 팔찌를 겸하여 차고 다녔다. 시계를 좋아하니 비싼 시계가 아닌 팔찌와 같이 예쁜 시계 컬렉션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작고 반짝이는 시계들은 내 팔목에서 빛나고 있었다. 몸은 뚱뚱하지만, 팔목이 유난히 가는 편이라 시계를 찬 손목은 나를 더 돋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결혼 초에도 나에게 시계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액세서리를 멀리하면서 시계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다. 작은 아이의 손길이 닿는 곳에 예민한 시계를 두기가 조심스러웠고, 한동안은 스마트폰이 시계의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가방에서 폰을 꺼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결국 나를 추억의 시계로 다시 이끌었다.


시계를 다시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교실이나 강의장에 대부분 시계가 있지만, 간혹 없는 곳도 있어 손목의 시계를 보는 것이 편했다. 강의 중 슬쩍 내려다보는 시계는 마치 시간의 동반자처럼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었다.


화장대 서랍을 열 때마다 만나는 옛 시계들은 각기 다른 인생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월급으로 산 시계, 떨리는 마음의 결혼 예물로 받은 시계, 특별한 기념일에 남편이 선물한 시계... 각각의 시계는 인생과 시계가 만나는 한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다. 마치 시간의 타임캡슐 같아서, 손에 들 때마다 그 시절의 감정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세월이 흐르며 작은 숫자를 읽기 위해 안경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시계는 멈추었지만, 내 삶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새로운 시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단순히 더 큰 숫자판의 필요성만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즘은 쇼핑몰에서 알이 큰 시계를 유심히 자주 살펴보게 된다. 예전에는 여성 시계로 팔찌와 같은 가는 디자인만 골랐는데, 이제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실용적 디자인의 시계에 눈길이 간다. 한때는 미적 가치만을 좇던 내가 이제는 실용성을 우선시하게 된 것이 새삼 낯설다. 그래도 여전히 중년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남아있어, 기능과 디자인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런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계를 새로 사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자꾸 미루는 것은 어쩌면 나이 듦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의 작은 저항일지도 모른다. 거울 속 희미한 주름과 함께 찾아온 노안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일 것이다.


손목 위에서 똑딱거리며 흐르는 시간 이야기는 내 인생의 리듬을 만들어왔다. 첫 시계를 차던 설렘부터 이제는 보기 힘든 작은 숫자판까지, 시계와 함께한 순간들이 내 삶의 페이지를 채워왔다. 언젠가 새로운 시계를 고를 때,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또 하나의 시간의 동반자를 맞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작은 숫자판처럼 흐릿해진 청춘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추억이 새겨져 있다. 다음 시계는 어떤 인생의 순간들을 함께할지, 그 설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기다림이 되지 않을까?



#손목시계 #추억의시계 #인생시계 #노안과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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