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쯤 전 어느 날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거실의 소파 위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아빠."
"집에 있니?"
"네."
"내가 조금 이따가 갈 거니까 나가지 마라."
"네.“
늘 그래왔듯이 용건만 말하고 뚝 끊어진 아빠의 전화.
얼마 후 인터폰이 울리고 아빠의 모습이 보여 현관으로 나갔다. 아빠는 손에 잔뜩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오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는 빈티지 턴테이블이었다.
"아빠, 이걸 어디서 사셨어요?"
"아침에 일찍 용산 전자상가 가서 사 온 거야."
"아빠 혼자 가셨어요?"
"아니, ○○전자 하는 아저씨랑 같이 다녀왔지."
"이 무거운 걸 들고 용산에서 버스 타고 오신 거에요?"
"그렇지 뭐."
"아이고 아빠 그냥 두면 제가 사도 되는데 용산까지 가서 이 무거운 걸 들고 오셨어요."
"사라고 했는데 네가 안 사잖아. 이제 LP판 꽂아 두지만 말고 음악 들어."
대학생부터 용돈을 모아 샀던 LP판이 있다. 예전에는 친정에 턴테이블이 있어 음악을 듣기도 했었지만, 고장 나서 버린 후 음악을 듣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모아 놓은 LP판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할 때마다 들고 다녔다. 추억이 담긴 흑백사진처럼 소중했던 음반들, 아빠는 나에게 턴테이블을 사라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늦은 결혼에 육아로 정신없는 나는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미루고 또 미루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찾아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아이 책 한 권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음에 걸리셨는지 소리 없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사오신 것이다. 아빠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턴테이블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LP판은 나를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추억 속으로 소환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에게 추억을 소환해 주던 턴테이블이 멈추었다. 이제는 오디오 스피커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스피커가 고장 나서 쓸 수 없었다. 스피커가 없는 턴테이블은 마치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를 잃어버린 가수처럼 덩그러니 장식장 위에 놓여 자신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나를 보며 자주 말한다.
이제 턴테이블은 단순한 음악 재생기가 아니라 나에게 아빠를 추억하게 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못 가게 말릴까 봐 말도 안 하고 아침 일찍 용산으로 가던 아빠, 이제는 아빠를 만날 수 없다. 너무도 가정적이기에 정확한 시계처럼 퇴근해서 집안일에 참견(?)을 많이 하신 아빠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하지만 아빠의 그런 이야기도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저녁 노을이 물들 때면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 턴테이블을 보면서 학창시절 어두운 귀갓길 나를 기다려주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성이며 딸을 기다리던 그 모습이 턴테이블 위에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한 번도 제대로 효도하지 못한 딸에게 아빠의 마음을 담아 사다 주었던 턴테이블, 침묵 속에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스피커를 사야겠다. 아빠의 사랑이 담긴 소중한 선물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없이 건네준 선물이 천 마디 말보다 깊은 사랑을 전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래된 턴테이블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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