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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보리차처럼

by 한미숙 hanaya


나는 매일 보리차를 끓여 마신다. 정수기를 들이면 될 일을 굳이 주전자에 물을 담고, 가스 불을 켜고, 보리를 망에 넣어 끓인다. 이 모든 과정이 때론 번거롭게 느껴지지만, 왠지 모르게 정수기보다 직접 끓인 물이 더 마음에 든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보리차를 끓이는 행위는 어쩌면 내게 작은 안도감을 주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브리타 정수기에서 한 번 걸러낸 물이 주전자에서 끓기 시작하면 보리를 넣은 거름망을 담근다. 가스를 중간 불로 줄이고 5분 정도 더 끓인 후, 불을 끄고 거름망을 뜨거운 물에 좀 더 담가 둔다. 이렇게 하면 보리차가 적당한 색과 맛으로 더 깊게 우러난다. 그 구수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울 때면, 번거로운 과정도 모두 가치 있게 느껴진다.

우리 인간관계도 보리차와 닮아있다. 잠깐 후루룩 끓여낸 물처럼 대충 맺은 관계에는 깊은 풍미가 없다. 진정한 관계는 은은한 불에 오래 우려낸 보리차처럼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더디게 느껴질 수 있지만, 차가운 물이 서서히 온도를 높여 끓어오르듯 관계도 그렇게 쌓여간다.


신랑은 가끔 내게 물었다. "물이 한번 끓었는데 왜 보리까지 넣고 또 끓이냐고?" 그 말처럼 세상에는 물이 끓자마자 서둘러 불을 꺼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관계도 그렇게 성급하게 맺고 끊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서두름은 결국 진한 맛을 놓치는 일이다.


때로는 진심이라 믿었던 마음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의 실망감은 쓰디쓰다.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눴던 이에게 상처받는 모습을 볼 때면, '진실'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그럴듯한 포장 속에 숨겨진 실체를 보지 못했을 뿐일까. 그 포장이 벗겨지는 순간의 민낯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이제는 거짓 없이 구수한 보리차 같은 사람이 더 좋다. 달콤한 설탕이나 자극적인 짠맛으로 유혹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본질 그대로 우러나오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세상을 따뜻하지 않을까? 끓어 오르는 보리차를 보며 생각한다. 차가운 겨울날, 따뜻한 보리차가 몸을 데우듯, 진실한 마음은 세상을 데울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보리차를 우려낸다. 관계도, 삶도, 그렇게 천천히 깊어지길 바라며.



#보리차 #일상의의미 #관계에세이 #사물에세이 #느림의미학 #진심 #삶의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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