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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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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Mar 13. 2019

나는 나를 박제하기로 했다

나는 결정했다.

20대의 끝자락에 선 지금,

나의 스물하나를 영원히 박제해야겠다고.


남들보다 1년 늦게 입학한 대학. 특별한 로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다 해보고 싶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학보사에서 기사 쓰고, 주말에는 알바를 했다. 물론 매일 일만 했던 건 아니다. 가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스터디를 째기도 하고 친구에게 교양수업 대출을 부탁한 채 늦잠을 자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학보사 선배들과 근처 맛집에서 뒤풀이하며 놀기도 했다. 배 터지게 먹고 돌아오는 길, 과식했던 탓인지 술도 안 마셨는데 속을 다 게워냈다. 먹는 것까지 열심히 했을 정도로 스스로를 ‘열정’이라는 틀에 몰아넣었다.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체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없었다. 감기나 장염에 걸려도 열이 펄펄 끓는다든지 응급실에 가야 한다든지 할 만큼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건강은 자신 있었다. 2012년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 오기 전까지는.


7년 가까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미약한 두통에 신경이 쓰였다. 평소에도 자잘한 두통이 있었기에 특별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점심 즈음부터 두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성실맨이었던 나는 차마 조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점심으로 동료들과 짜장면을 시켜 먹은 후부터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았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그 고통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입맛이 없어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전부 토했다. 띵띵 부은 짜장면이 나왔다. 눈물이 찔끔 났다.


ⓒStockSnap on Pixabay


처음 찾아간 병원 응급실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받고 나는 기분이 좀 좋았다. 당시에는 누구도 나에게 병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어렴풋이 심각한 의사의 표정과 엄마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멀리서 의사와 엄마가 뭐라 뭐라 말했는데 “종양이 너무 깊이 있고 커서 수술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 들렸다. 엄마 친구가 찾아와 엄마를 위로했고 나를 도닥였다. 진통제에 취한 나는 머리가 박살 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고, 친구에게 [나 좀 심각한 것 같은데?ㅋㅋㅋ]하며 카톡을 보냈다.


그게 나의 스물한 살 초여름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녀석과의 첫 만남이었다. 물론 녀석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안에 살고 있었고 두통과 구토로 존재의 시그널을 보냈지만, 나는 그를 그날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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