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뇌종양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같은 병동을 쓰는 환자들은 모두 나이 든 어르신이었다.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젊은 사람이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안쓰러워했다. 그들이 그럴수록 나는 현실을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꼭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 같았다.
어느 날 입원 수속을 밟고 있는 또래를 보았다. 순간 그 아이도 뇌종양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공평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고통받을 수는 없으니까. 복도를 지나는 짧은 시간 동안 정말 간곡히 바랐다. 그러나 그 아이의 병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그 이후로 병동에서 마주친 적도 없었다. 아마도 다른 병동에 자리가 부족해 잠시 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추측이 맞는 것 같아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랬다. 당시 나에게 필요한 건 응원이나 위로, 격려, 걱정, 동정, 공감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이었다. 나와 같은 불행을, 나보다 더한 불행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기꺼이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는 ‘비련의 여주인공병’ 말기였다. 신체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중증이었다.
소설가 윤은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나 보다. 그는 다른 말로 위로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많이 걸으라고 했다. 이동을 위한 수단으로써 걷기가 아니라 오직 걷기를 목적으로 하라 했다. 걸으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그 말은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하는 내 마음을 멈춰 세우는 브레이크였다. 타인의 불행이 삶의 원동력이었던 나는 걸으면서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비로소 자립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지금도 완전하지는 않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불행에서 희망을 찾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냥 걷다 보면 다시금 단단해지곤 한다.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