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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Oct 21. 2023

클라이밍 압수 당하고 몰클 하게 된 썰

슬스레터 #15

클라이밍 실력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안클’이라고들 한다. 직접 겪어 보니 정말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어쩌다 보니 슬스팀원들 모두 알게 되었다. (혹시 아직 모르신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시기를 기원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정작 골절이 있었던 왼발은 멀쩡한데 조금만 무리해도 염증이 도지는 오른발 때문에 8개월 넘게 클라이밍을 쉬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클라이밍은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자주 갔던 암장 벽이 훨씬 높게만 느껴졌고 그 아래 선 나는 하찮은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또 다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커져서 과감한 무브는 시도조차 못 했다.


자연스럽게 클라이밍 에세이를 쓰기도 힘들었다. 암장에 나가야 쓸 만한 에피소드가 생길 텐데! 새로운 클라이머를 만나지도 못하고! 슬스팀의 중심축이었던 내가 쳐지자 팀원들도 자연스럽게 쳐지고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됐다.


마음을 다잡고 클라이밍을 해보려고 했지만, 클라이밍은커녕 그냥 걷기만 해도 오른발이 빨갛게 부어올라 꽉 끼는 암벽화를 신는 것부터 크럭스*였다. 왜 염증이 나는지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한의원 다 가보았지만 모든 의사 선생님의 결론은 ‘왼발을 다치면서 오른발에 무리가 온 것 같다’는 추측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염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크럭스: 암벽의 전체 루트나 피치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그러다가 뜻밖에 허리가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오른발 염증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병명은 강직성 척추염. 염증으로 인해 척추 관절이 서서히 굳어가는 병인데 자가면역질환이라 관절 여기저기에 쉽게 염증이 생긴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오른발에 염증이 생겼던 거다.


클라이밍은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다.


원인을 알게 된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어이없게도 ‘클라이밍 계속할 수 있나?’였다. 평생 관리만 잘해 주면 척추가 굳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강직성 척추염 환자는 골밀도가 낮아, 특히 여성은 골다공증 발생 확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즉 다른 사람보다 골절 위험이 크다. 실제로 난 아직 골다공증까지는 아니지만 또래보다 골밀도가 낮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아빠는 검사 결과를 듣자마자 “이제 벽 타는 거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왼발이 골절된 걸 보면 클라이밍은 내게 정말 위험한 운동인 것 같기도 하다. 의사 선생님한테 클라이밍 해도 되는지 확실하게 알아보고 싶었는데 정말 안 된다고 할까 봐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것으로 나 혼자 합의를 봤다. 부상 전에는 주 4일 이상 하곤 했는데 이 정도면 엄청나게 양보한 셈이다. 그리고 재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수업 때마다 클라이밍을 안 할 수는 없느냐고 묻는다. 필라테스로 척추의 정렬을 바르게 맞추어도 클라이밍의 과감한 무브가 다시 몸을 틀어지게 바꾼다는 이유에서다. 이쯤 되면 세상이 나의 클라이밍 사랑을 억까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책상 밑에서 몰래 핸드폰 하는 학생처럼 ‘몰클’을 하게 됐다. 큰 백팩에 암벽화, 초크 백, 운동복을 챙겨서 친구들 만나는 것처럼 나갔다가 클라이밍을 하고 돌아오곤 한다. 그마저도 컨디션이 따라주지 못해 주 1회는커녕 월에 한두 번 하기도 힘들 때가 많다. 당장 이번 주 금요일 리드 약속도 파투 냈다.


그런데도 왜 클라이밍을 계속하느냐고? 간단하다. 재미있어서. 솔직히 이전에는 클라이밍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계속 성장해야 하는데 나만 정체된 듯하고, 근력도 용기도 끈기도 부족한 것만 같아 주눅 들 때도 있었다. 반면 지금은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압박보다 벽을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됐다. 그러다가 뜻밖에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면 성취감은 두 배가 돼 오히려 이득이다.


앞으로도 클라이밍을 온전히 즐기면서 오래도록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모두 언제나 안클 하고 건강하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클라이밍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데는 ‘어떤 클라이머들’의 영향도 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레터에서 풀어볼 예정이다. 오늘 레터는 긴 휴재에도 슬스레터를 기다렸을 분들께 드리는 사과문이자, 슬스팀의 리더로서 다시금 마음을 다지는 고백이었다. 별안간 찾아갈 다음 레터도 기다려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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