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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Jul 27. 2024

클라이밍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슬스레터 #34

"취미가 뭐예요?"


누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렸을 때는 그나마 책이라도 자주 읽어서 '독서'라고 얼버무렸지만, 성인이 된 후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독서라고 말하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최근엔 무슨 책을 읽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괜히 잘못 말했다가 내 밑천이 다 드러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항상 "글쎄요… 취미랄 게 딱히…" 하고 멋쩍게 웃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깊게, 길게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1년 정도  해리포터에 빠져 살았는데 얼마 못 가 관심이 식어 아이돌로 눈을 돌렸다. 그마저도 일본 활동으로 국내 컴백이 늦어지자 2년 정도 만에 마음을 접어버렸다. 아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생각해 보니 연애도 자의든 타의든 3년이 허들이었던 것 같다. 10년 넘게 무언가를 좋아하면서 전문가라 부를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는 소위 덕후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되나? 싶은 고민이 들었다.


그런 내가 요즘은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무언가가 있다. 다들 벌써 눈치챘겠지만, 클라이밍이다. 클라이밍이 좋아서 멋진 클라이머를 만나 인터뷰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메일을 보낸다. 왜 그렇게까지 클라이밍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좋다.


탑 홀드를 제압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아쉬움도, 마침내 제압했을 때 느끼는 짜릿한 쾌감도, 다른 사람의 멋진 무브에 감탄하는 일도, 서로 나이스를 외쳐주는 활기찬 모습도 좋다. 무엇보다 일단 홀드를 잡으면 루트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참 좋다. 문제가 겹쳐서 못 풀 만큼 암장에 사람이 바글바글한데도 막상 벽에 붙으면 세상에 벽과 나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좋다. 오직 나와의 싸움인 그 잠깐의 시간이 좋다.




클라이밍, 아… 아이싯떼룻!


이렇게 좋아하는데도 누가 "와, 클라이밍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말하면 왠지 부끄러워서 항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클라이밍에 진심인 진짜 '클친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과 같은 바운더리에 들어가는 게 송구스럽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도 주 5일을 암장에 들락거릴 만큼 미쳐 있었는데, 지금은 허접한 실력의 클찔이에다 레벨업할 의지도 없다. 이쯤 되면 클라이머인 척 흉내 내는 패션 클라이머라고 불러도 된다.


그런데 최근 회사 동료 올리브 님이 "충분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라고 반문해서 조금 놀랐다. 일주일에 몇 번 클라이밍을 하느냐가 애정의 기준이 될 수는 없으며, 아예 안 하는 사람보다 매주 한 번이라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낫다는 논리였다. 게다가 좋아하니까 콘텐츠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누가 퇴근하고 시간을 들여 클라이밍 에세이를 쓰느냐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맞는 말이었다. 나의 진심을 다른 이들의 기준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오늘 퇴근 후에 올리브 님과 클라이밍을 가기로 했다. 그에게 클라이밍을 전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여쯤 됐다. 은근하게 클라이밍에 빠져들 수 있도록 천천히 자리를 마련하는 중이다. 오늘이 그의 두 번째 클라이밍이다. 언젠가 올리브 님도 클라이밍을 좋아한다고 말할 날이 올까? 활활 타오르기보단 은은히 오래도록 클라이밍을 좋아하길. 올리브 님도, 나도.


아무튼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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