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스레터 #32
동물원 콘셉트, 타잔 밧줄 타기, 온라인 게임을 옮겨 놓은 듯한 문제까지! 요즘 암장마다 도파민 싹 돌게 하는 독특한 볼더링 문제를 많이 내는데요. 도대체 이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는 걸까요? 너무 궁금한 나머지 독창적인 볼더링 문제를 만드는 피커스 클라이밍 루트 세터를 직접 만나고 왔어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피커스 클라이밍 구로점 팀장이자, 구로점과 신촌점 치프 세터(Chief Setter)를 맡고 있는 정인준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보통 루트 세팅은 팀을 이뤄서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인준 님이 함께하는 분들은 어떤 팀인가요?
피커스 클라이밍은 전문 세팅 팀이 있어요. 종로점에서 3명, 구로점에서 2명의 직원이 모여 총 5명이 세팅 팀이 구성됐죠. 이 외에 다른 피커스 강사분들도 루트 세팅을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서 조금씩 가르치고 육성 중이에요.
재미있는 루트를 세팅하는 비결
피커스 하면 구로점 컴피월의 마치 게임 퀘스트 같은 문제가 떠오르는데요. 그동안 출제했던 문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루트는 무엇인가요?
피커스에서 컴피월에 낸 문제들은 다 좋았어요. 피커스에서만 해볼 수 있는, 처음 시도해 본 루트가 많았거든요. 다른 기업과 협업한 커머셜한 문제도 독특했고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사진도 찍고 즐겼던 문제들이 기억에 더 남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암장에서 여는 대회를 준비하며 세팅했던 경험이 재미있었어요. 세터들이 변별력을 나누기 위한 구간과 문제들을 예상해서 세팅하는데요. 예를 들어 1등과 2등을 가르기 위해 특정 구간을 살짝 어렵게 세팅해요. 그런 예상들이 대회 현장에서 딱 맞아떨어질 때 세터로서 뿌듯하고 즐겁죠.
그런 창의적인 루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세요?
사실 특별한 비법은 없어요. '사람들이 뭘 좋아할까?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조금 더 다르게 할 수는 없을까?' 일상 생활하면서 마치 나사 풀린 것처럼 계속 생각해요. 너무 일이라고만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더 안 떠올라요. 가볍게, 농담 던지듯이 팀원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놀다 보면 하나씩 떠올라요.
아구몬(공룡) 문제도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어요. 귀여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귀엽게 만들어 볼까' 했는데 홀드를 입체적으로 활용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볼륨 여러 개를 붙이고 또 붙이면 더 튀어나오게 만들 수 있는데, 그동안은 하나로만 표현하려고 했던 거죠. 입체적으로 만드니까 멀리서 봤을 때도 훨씬 눈에 띄어서 좋더라고요. 그렇게 만들어 놓으니까 더 귀엽게 이빨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아구몬 문제의 탄생 스토리예요.
이빨 모양 홀드처럼 너무 찰떡이라 놀란 홀드들이 많은데요. 혹시 직접 제작하시나요?
기업과 협업해서 제작한 홀드를 제외하고 돌림판 같은 홀드는 시중에 나와 있는 홀드예요. 근데 국내 암장에서는 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요. 돌림판처럼 엄청나게 큰 홀드를 좁은 실내 암장에 붙이기에는 공간 활용도가 떨어지거든요. 피커스에서 대형 홀드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이유는 컴피벽(Competition wall) 외에도 충분한 볼더링 공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창의적인 문제를 많이 낼 수 있어서 세터로서도 좋죠.
홀드 관련된 일도 하셨다고 알고 있어서 직접 제작하신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루트 세터로서의 커리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잠깐 다른 일도 했었는데 클라이밍이 너무 좋아서 안 되겠더라고요. 처음엔 볼더프렌즈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는데요. 이후 홀드 관련 일도 1년 정도 했고요. 거기를 정리하는 도중에 피커스에서 러브콜이 왔어요. 구로점 오픈을 팀장으로서 같이 해줄 수 있겠냐고요. 타이밍이 좋았죠.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하는 직업
혹시 루트를 세팅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안전이에요. 위험하다 싶은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해요. 클라이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안전이라고 생각해요.
둘째는 피커스 고객층에게 맞는 문제를 내려고 신경 써요. 아무래도 중상급 레벨인 분들이 피커스를 많이 찾아주시고, 접근성이 좋다 보니 초보분들 유입도 많은 편이에요. 너무 어려워서 아무도 못 푸는 문제는 내지 말자는 원칙이 있어요. 가끔 문제를 내다보면 재미있게 내야 한다는 욕심에 점점 어려워질 때가 있어요.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계속 수정하죠. 세터가 재미있는 문제가 아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곱씹으면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팀장이자 치프 세터니까 '전체적인 그림'도 꼭 체크해요. 암장을 쭉 둘러보았을 때 어느 벽도 부족함 없이 매력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해야 할까요? 보기에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은 것처럼, 보기에 좋은 루트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 원칙에 맞게 세팅하면서 수정하고 또 수정해요. 제가 한 루트 세팅에 만족하는 순간 뒤처져요.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요.
루트 세터로서는 고난이도 무브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 같아요.
네, 아무래도 한 편으로는 아쉽기도 하죠. 가끔 말씀을 세게 하는 분 중에 "세팅 대충 한다"며 비판하는 클라이머도 있거든요. 하지만 몇몇 부정적인 피드백 때문에 피커스를 사랑해 주는 클라이머분들의 재미를 앗아갈 수는 없어요. 어떻게 하면 다양한 무브를 활용해서 적절한 난이도를 구현할 수 있을지를 제가 더 고민해야죠. 그런 피드백을 이겨내고 피커스가 얼마나 재미있는 센터인지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구커스에 꿀보라 떴다"고 하면 서운하진 않으세요?
꿀OO 문제가 있다는 피드백은 저희에게 오히려 긍정적이에요. 문제를 낼 때 난이도를 정하는데요. 쉬운 문제, 중간, 어려운 것으로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춰요. 사람들이 꿀보라라고 말하는 문제는 세팅할 때부터 낮은 난이도로 설정한 거예요.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반응인 셈이죠.
반면 쉽게 낸 문제인데 사람들이 너무 어려워하면 아쉬워요. '아, 이렇게 수정할 수 있는데 왜 생각하지 못했지?' 하고 조금 더 난이도를 맞추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해요. 다른 클라이머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세터도 성장하는 것 같아요.
여러 클라이머를 만족시키는 세팅을 하기란 어렵네요.
루트 세팅에 정답이 없다는 점이 어려워요. 저는 음식에 비유를 많이 하는데요. 누군가에게는 정말 맛있는 음식도 다른 사람에겐 별로일 수도 있고 싫어하는 재료가 들어갔을 수도 있고, 평가가 제각각이잖아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죠. 유명한 식당에 가도 나쁜 후기를 남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세터도 모든 클라이머를 만족시킬 수 없고 부정적인 피드백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서 더 나은 루트를 세팅하기 위해서 틈틈이 후기도 찾아보고 피드백을 바탕으로 개선점을 찾아가요.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하는 클라이밍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힘들진 않으세요?
힘들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는 듯해요. 새로운 걸 찾기 위한 마인드컨트롤을 자주 하거든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해야 하나요. 자신을 돌보는 일이 어떤 영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에 대해 분석하고 돌아보는 편이에요. 아이디어를 위해 암장에 앉아 클라이밍만 생각하기보단 밖을 나가서 좀 더 걷기도 하고요. 계속 시선을 클라이밍 외적인 것들에 두려고 노력하죠.
리프레시를 하기 위해 인준 님만이 찾는 특별한 장소가 있나요?
딱 한 곳만 꼽자면 떠오르는 곳이 마땅치 않은데요. (웃음) 탁 트인 곳이나 제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장소를 찾아가요. 최근에 가본 곳 중에서 꼽자면, 하와이요! 신혼여행으로 하와이에 갔는데 그때 느꼈던 여유로움과 하와이에서만 볼 수 있는 색감, 풍경들이 좋았어요.
그렇다면 인준 님이 앞으로 세터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언젠가는 센터를 오픈하고 싶어요.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의 동네 암장이요. 너무 치열하기보단 마음 편하고 회원들과 더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언젠가 오픈하게 된다면 슬스레터에 다시 나와 주세요. 응원할게요!
마지막으로, 슬스레터 공식 질문인데요. 인준 님에게 클라이밍이란?!
인생 그 자체인 것 같아요. 희로애락이 담겨 있거든요. 인생이 엄청 힘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즐겁기도 하잖아요? 클라이밍도 그렇고요.
저는 클라이밍 하면서 와이프도 만났어요. 사실 와이프도 강사예요. 언젠가 만들 암장도 함께할 생각이고요. 그래서 더욱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일들이 기대돼요. 그만큼 클라이밍은 그냥 제 삶 자체예요. 너무 스며들어서 무슨 일을 해도 생각이 나고요. 이제는 제 삶과 클라이밍을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어요.
협업 문의 : slowstarter@slowstart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