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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네 May 16. 2024

에브리띵 이즈 어바웃 힙

슬스레터 #33

나는 프로 시작러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재밌어 보이는 일이라면 일단 시작하고 보는 편이고 부딪혀본 뒤에 ‘아하? 이런 준비를 해야 했구나?’하고 알아간다. 일단 해봤더니 내 취향에 찰떡인 운 좋은 경우도 있다. 클라이밍이 딱 그런 경우인데, 나는 체험한 첫날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월권을 등록했다.

처음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는 팔 힘이 없는 게 걱정됐다. 순두부 같은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턱걸이 1초도 힘들었던 학창 시절 체력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이건 하체 힘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고 결국 코어와 등과 어깨와 손목 발목 기타 등등 전신 근육을 쓰는 대단한 근력 운동임을 깨달았다.

“사실 클라이밍의 모든 것은 엉덩이에 달려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클라이밍 무브를 한 번 더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클라이밍의 모든 것은 엉덩이에 달려있어요!" IFSC(국제 클라이밍 연맹) 클라이밍 월드컵 중계를 하던 해설가가 한 말이다. 모든 것이 엉덩이에 달려있다니 알듯 말듯 한 이 말이 뇌리에 박혀 문제를 풀면서도 계속 떠올랐다. 원래 같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아직 나약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혹시 엉덩이가 원인인가 싶어 문제에서 떨어질 때마다 나의 엉덩이가 어디에 있었는지 고민했다. 

다리 힘이 좋다면 탄력 있게 뛰어오를 수 있고 팔 힘이 좋다면 오래 매달릴 수 있다. 하지만 엉덩이가 제자리를 못 찾으니 뛰어오른 몸뚱이가 착지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버틸 때까지 버티던 팔에 힘이 다해 결국 떨어지고 만다. 엉덩이를 어디에 두는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었다. 농담처럼, 엉덩이 깨우침(?)을 얻은 뒤로 빠르게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엉덩이! 나는 겨우 엉덩이 한 끗 움직임이 등반을 수월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에 적잖이 감명받았던 것 같다. 


시작이 반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쉬운 나는, 시작이 반이라는 이 말이 결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쓰는 변명 같았다. ‘시작이라도 했으니 반이나 했다’는 대단한 정신 승리의 말. 그 생각이 점점 커져 나는 시작조차 주춤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이를 먹으면 다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지레 겁이 난 것뿐이다. 오르지도 버티지도 못하겠는 시점이 오면 갖은 핑계로 완등을 포기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길 반복할까 봐.

그러나 너무 쉽게 나의 나약함을 탓하지 않아도 괜찮다. 펄쩍펄쩍 뛰어 보고 버틸 만큼 버텨도 안 된다면 엉덩이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할 위치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으니. 중심이라 함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동기이자 목표, 방향성 같은 근본적인 이유라고 표현하면 좋으려나. 클라이밍 하나 하면서 나는 인생의 개똥철학까지 얻었다.


요즘 사는 게 지지부진하게 느껴진다면 엉덩이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매달려 있는 사람도 어딘가로 뛰어오를 준비를 하는 사람도 다음 홀드를 잡고 싶다면 엉덩이를 슬쩍 옮겨보시길. 언젠가 그다음 홀드가 탑 홀드인 순간도 올 거라고 믿으면서. 에브리띵 이즈 어바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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