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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슬스레터

암장 문을 열고 나가면 생기는 일

슬스레터 #50

by 단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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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바위로 슬스팀을 인솔하는 클동여지도 가람 님


누가 좀 데리고 나가줘…!


지난 주말, 처음으로 자연 볼더링을 다녀왔다. 클라이밍 레터를 발행할 만큼 누구보다 클라이밍을 좋아하는 우리인데 자연 볼더링이 처음이라니!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일단 자연 볼더링을 가자고 권유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보가 없으니 괜히 ‘자연 볼더링 = 어렵다’고 지레 겁먹게 됐다.


그런 우리에게 드.디.어. 같이 자연 볼더링을 가자고 권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슬스레터 애독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클동여지도] 제작자, 가람 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인터뷰를 인연으로 “언제 한 번 자연 같이 나가요~”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그냥 인사치레인가 싶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자연 볼더링을 언제 또 해볼까 싶은 마음에 앞뒤 안 가리고 덥석 물었다.


아무튼 우리가 간 곳은 안양에 있는 비봉산. 이런 산이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마 관악산-삼성산에서 이어지는 작은 산인 듯하다. 이렇게 작은 산에도 클라이머들이 찾아와 바위를 탐험하고 루트를 개척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각자 매트를 하나씩 짊어지고 길이 아닌 것 같은 비탈길로 가람 님을 따라 올라갔다. 3분쯤 올랐을까? 집채만 한 바위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거대한 바위가 아니었다. 갑자기 앞서 걷던 일행들이 하나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엥, 누가 있나? 고개를 내밀고 둘러보니 그제야 먼저 와 있던 다른 클라이머들이 보였다. 요즘같이 삭막한 세상에 서로 인사해 주는 문화라니. 너무 오랜만에 겪는 따뜻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70739_2482930_1730424537301905637.jpg 두근…! 처음 느끼는 바위 맛!



존버의 재미를 되찾다


오늘 풀 문제가 있는 바위 아래 매트를 깔고 난 뒤 가람 님이 간단히 규칙과 기본 예절 몇 가지를 설명해 줬다.


① 신발 신고 매트 위에 올라가지 말 것 (암벽화는 가능!)
② 금연
③ 스타트 홀드는 정해져 있지만 발 홀드는 자유


사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대부분 다 상식적인 내용이어서 어려움이 없었다. 첫 자연 볼더링이 어지간히 걱정된 탓에, SNS에서도 기본 예절을 찾아본 덕도 있었다. 자연 볼더링 예절 관련된 자료는 인터넷에 많으니 충분히 숙지하고 가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처음 만져본 바위 홀드는 어땠냐고? 자연은 정말 냉정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예쁜’ 홀드들만 만지면서 살았는지 깨닫게 됐다. 만날 저그 아니면 안 한다며 홀드 편식을 일삼았던 날들을 후회했다. 실내 암장의 혹독한 홀드 3대장 - 슬로퍼, 핀치, 크림프는 모두 자연 바위를 극복하기 위한 연습이었구나. 그 연습을 무척 게을리 한 대가를 이날 빵클로 치르게 됐다. (이게 다 아침에 빵을 먹어서 그런가… 이제부터 등반 전 빵 금지!)


그렇다고 재미없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빵클 하고도 이렇게 뿌듯하게 집에 돌아간 적이 있었나? 단언컨대 이날이 처음이다. 우리는 한 문제만 몇 시간을 다시 풀고 또 풀었다. 잠깐 가람 님이 다른 문제도 풀어보라고 안내해 줬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떨어졌던 그 문제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마 몸 상태만 괜찮았으면 우린 좀 더 버티면서 계속 붙었을 거다.


마치 클라이밍을 막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근래 우리는 실내 암장에서 안 풀리는 문제를 끈질기게 존버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없어질 문제니까. 한 문제를 집요하게 반복해서 도전하며 마침내 풀었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조약돌로 불씨를 피우듯, 우리는 바위에 부딪히고 또 문대면서 오랜만에 열정의 불꽃을 피웠다.



70739_2482930_1730424609996862856.jpg 조금씩 바위를 오르는 단팥과 든든하게 뒤를 봐주는 선배님



새로운 세상을 뒤로하며


쌀쌀한 날씨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먼저 산에서 내려왔는데,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약간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처럼. 처음이라 힘든 점도 있었지만 날이 따뜻해지면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트레이닝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마지막으로 자연 볼더링이 좋은 점을 더 꼽으라면 정말 많지만… 지면의 한계가 있으니 딱 두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먼저, 현란한 다이내믹 무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너무 낮은 난이도만 풀어서 그럴 수 있지만, 다른 분들이 푸는 모습을 보아도 과감한 점프 같은 동작은 없었다. 스태틱한 무브를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마음에 쏙 드는 포인트였다.


두 번째는 사람이다.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바위 아래 삼삼오오 모여 함께 루트를 탐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연 볼더링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앞서 소개한 것처럼 서로 인사를 나누는 문화도 포근하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잘 챙겨준 이름 모를 선배님들도 정말 좋았다. 클라이밍을 나보다 먼저 시작한 어른들을 ‘선배님’이라 칭하는 문화도 마음에 들었다. 국내에서 클라이밍이라는 문화와 루트를 먼저 개척한 분들께 존중과 예의를 담은 표현인 듯했기 때문이다.


슬스팀을 따뜻하게 맞아줬던 선배님들을 여러분도 만나고 싶다면 어서 자연으로 나가시길. 암장 문을 열고 자연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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