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가 결정되고, 내 인생에 <담당교수님>이라는 존재가 생겼다. 뭔가 담임선생님 같은 느낌이랄까.
한 학교에 조금 적응할 때쯤 담당교수님과 나는 상담을 하게 되었다. <상담>이라는 것은 '필수'라고 들었을 때 신기하였다. 연구실이라고 써져 있지만, 내 눈에는 정형적인 <사무실> 같았다. 그곳으로 가서 교수님은 내게 물을 건넸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름이 다슬이 맞지?"
라고 말씀을 하셨다. 내 이름과 정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네. 맞습니다."
나는 이유를 모르겠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교수님은 굉장히 온화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으셔서 내게 질문을 하셨다.
"다슬이는 어디가 불편하니?"
라는 말씀으로 하셨다. 그러나 '사실 육안으로 봐도 다리가 불편한 아이라는 것은 알 텐데'라고 생각을 하였다. 굳이 이것을 왜 물을까 싶었다. 그러나 거의 초면이기 때문에 대답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뇌병변 중증장애이고, 왼쪽이 다른 곳보다 강직이 심한 편이고, 뇌전증이 있어서 큰 소리에 예민해요."
라고 구체적이지만, 짧게 이야기하였다.
"음.. 똑똑하네"
하고 웃으셨다.
'똑똑하다'라는 의미가 굉장히 궁금했다. <중증장애인>이어서 구시대적 또는 이론적 사고에 갇혀있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묻고 싶었다. 교수라는 관직이기에.
그러기에 좀 더 듣고 있었는지 모른다. '똑똑하다'라는 말을 꼽씹으며 말이다.
"너처럼 본인 장애를 아는 장애인이 흔하지 않은데.."
"아 그런가요?"
라고 머쓱하게 대답을 하였다.
장애이론을 전공하신 교수님이라 조금 더 믿음이 갔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바사삭-하고 무너지고 20살의 살짝의 패기가 첨가가 되었다.
"다슬아, 너는 정-말 운이 좋은 장애인이야."
라는 이 한마디가 시리도록 아프고, 나를 날 서게 만들었다.
'세상에 운이 좋은 장애인도 있던가. 누가 그런 막말을 하는가!'라는 속마음을 꾹꾹 누르고 대답을 하였다.
"제가 왜 운이 좋아요?"
이유 또한 궁금했다.
"글씨 읽을 수 있고, 의사표현 가능하잖아"
"그게 운이 좋은 거예요?"
"그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더욱 이성에 끈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말을 하고, 앉을 수 있으며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시네. 장애인복지 전공교수 맞아?'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뇌리에 꽂힌 '운이 좋은 장애인'이라는 단어.
"그러면 교수님께서는 장애가 없으시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교수님은 얼마나 운이 좋으시길래 장애가 없으세요?"
나는 뾰족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교수님은 내 상처에 굵은소금을 미친 듯이 뿌린 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 크흠 그런데 나는 안경을 써서 시각장애인이라고도 볼 수 있지? 노안도 있으니까"
나는 황당하여버렸다.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 마냥 나는 얼음-이 돼버렸다.
"교수님 세상에 운이 좋은 장애인은 없어요."
"뭐라고?"
"아까 교수님이 하신 표현에 저는 상처를 받았어요. 제가 어떤 노력을 해서 이 상태까지 오신 지 모르시잖아요. 그렇게 장애인이 되는 게 운이라면 교수님은 운이 굉장히 좋으신 분이세요."
라고 하며 맹수처럼 물고 늘어졌다.
나를 보시며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물어진 결과,
"네가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정말 사막같이 무미건조하게 사과의 메시지'만' 말씀을 하셨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사과.
세상에 누가 장애를 갖고 싶어 할까? 사회적 낙인과 꼬리표. 굉장히 불편하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이 한가득이다.
운이 좋은 장애라고 백 번 이해해서 생각해도 답이 없다. 사회, 타인의 시선은 시리도록 아플 때도 있고, 미어지는 고통이 수반된다. 장애의 정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장애>를 '운'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운 좋은 장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