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의 감정레시피.

다름을 외치고 다니던 소녀.

by 다슬

이번 감정소재는 슬픔과 외로움과 분노 세 큰 술.


어린 소녀의 감정레시피는 나를 차별하며 놀리는 선생님이 계셨다.


'왜 너는 보조기구를 사용해? 왜 착용해?'라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하는 학원선생님이 계셨다. 지친 나는 이야기를 했다.


"저는 뇌병변장애인이에요."


"그게 뭔데?"

라는 말에 설명을 이야기를 하였다.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한 3번 이상을 반복을 하다가 지쳐서 나는 이야기를 했다.


"인터넷에 쳐보세요."


"그래도 모르겠는데?"

라고 하셨던 게 문득 생각이 나서 어른이 된 현재 글로 정리를 해본다.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팔, 다리 다 있다고 하면 정상입니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정상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낳게 되는 부모 또는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은 왜 비정상으로 구분이 되는 걸까?


물론, 사회적으로 불편함이나 사각지대에 있긴 하지만 왜 굳이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는 걸까?


그래서 나는 결혼이 무서워졌다. 왜냐하면 내가 장애인인데 아이를 낳는다면 다름의 대하여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될까? 이러한 생각을 초등학생 때부터 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만약 내가 자녀가 있다면 아이들이 '00이 엄마는 우리 엄마와 달라'가 아닌 '00이 엄마는 비정상이야'할 것 같았다. 미리 잔뜩 겁을 먹게 되고 이건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분법적으로 나눈 것들이 편견이 생기고, 그 편견이 편견을 낳는다.


그것을 깨닫고 무작정 도서관으로 향하였다. 장애를 갖은 저자의 이야기 또는 의학서적을 미친 듯이 뒤적거렸다. 어린 마음에 완치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기주장할 수 있는 나이 즉, 속되게 머리가 커졌을 때 내 또래의 아이들은 '너는 정상이 아니니까'를 더 많이 들었다. 단어 실수가 있다는 점도 감안을 했을 때도 또래와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결핍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구멍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 선생님들로 천천히 메꿔지고 있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질 때 복지선진국에 거주하거나 장애인이 여행하는 브이로그를 본다. 언제 우리나라는 저렇게 편하고 눈치 안 보이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씁쓸한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충돌한다.


사실상 장애인인식개선교육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학교에서의 교육이 가장 중요한데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나 현실의 부딪힐 때 묻는다.

"선생님, 정상의 기준이 뭐예요?"

라고 묻는다.


사실상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을 아직까지는 만나지 못했다.

사람 VS사람으로 봐줬으면 싶다.


나는 장애인복지나 인권에 관심이 많아서 다른 장애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지, 장애를 갖고 있어도 장애의 대한 정의나 관심도가 있는 사람을 찾기도 각각 달라서 장애인이니 관심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에세이라 나는 장애를 예시 아닌 예시로 말하고 있지만, 다른 생각들에 이건 '정상'을 단정 짓는 다면 2차 가해처럼 생길 수 있다.


기준치를 보다 낮더라도 그것을 '비정상'이라는 테두리에 넣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기 빨리는 일이었던 것 같다.


'정상'이라는 것, '비정상'에 대해 나도 나를 갇혀두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눈은 넓게.


대화는 이성적으로.


법의 범주와 도덕성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모두가 건강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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