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햇빛은 우리가 쓰려다만 희망을 적는다
[다시서점 10주년 기념 도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것』
#1. 햇빛은 우리가 쓰려다만 희망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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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우리가 쓰려다만 희망을 적는다
어느새 연필이 짧아지고 새 연필을 깎는 동안
언젠가 백 번쯤 적었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은
날개 젖은 새를 닮은 탓에 고개를 휘젓는다
먼 산은 이별을 할 때마다 오르던 산이었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은
정상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비정상이었다
지우개가 없었기 때문에 어제는 비가 내렸다
가슴을 문질러본 사람은 손이 지우개인 줄 안다
하늘은 기우제인 줄로만 알고 비를 내렸다
내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비웃는 사람도 있다
고도는 꼭 올 것이라는 내 농담을 비웃으면서
제 삶을 적어본 적 없이 타자 연습만 하면서
연필도 지우개도 쓰지 않는다 무엇도 적지 않는다
비가 그치자 새는 능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새는 오늘도 사랑이라는 말을 적을 줄 몰랐기에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정말이지 바보같은 짓인가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반짝이고
햇빛은 오늘도 우리가 쓰려다만 희망을 적는다
―김경현,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것(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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