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오성에 대하여』
이번 달 두 번째 책 『오성에 대하여』와 관련한 강의는 꽤 길었다. 보통 강연 노트만 보고 책을 바로 읽곤 했는데 이번 노트 필기는 형편없다. 강사의 길고 친절한 설명은 왕과 노예, 이성과 감정 같은 반대말 조합 속에 꾸겨져 있었다. 엉뚱한 생각을 했거나, 점심 식사 직후라 졸면서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증거가 나왔다. 군청색 침 자국! 침에 녹았던 잉크가 머리털을 풀어헤친 채 굳어있다. 고맙게도 강사는 강연을 녹음해 매번 준다. 노트도 다시 정리하고, 책에 대한 정보도 얻을 겸 음성파일을 재생했다.
흄이 말한 철학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 악을 근절하는 것! 이 말은 사실상 한 가지를 뜻합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믿고 말하지 마라! 그러려면 우리는 이성을 맹신해선 안 됩니다. 이런 취지를 담아 흄은 이성을 감정의 노예라고 합니다.
재생 중지.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크게 당황했다. 첫째, 이 중요한 내용을 왕과 노예라고만 달랑 적은 나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그래, 내려놓자. 내가 틀릴 수도 있지. 둘째, 흄의 주장이 너무 과격했다. 이성이 감정의 노예라니! 수많은 철학자가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를 이성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이건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성의 핵심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성이 감정의 노예라니? 감정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하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이게 모두 틀렸단 말인가!
다시 재생. 당시 서양 철학은 이성을 왕으로 모시는 합리주의가 강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을 닮은 이성은 사물의 본질과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러나 흄은 의심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그렇게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욕심에 따라 결정하고, 생각대로 안 되면 화내고 우기다가, 어떤 결과가 나오면 그 이유를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였습니다. 흄은 인간이 이성보다, 욕망과 감정에 더 많이 영향받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회사나 가정에서 열심히 일하셨죠? 왜 그렇게 하셨나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심층 분석한 끝에 그렇게 하셨나요? 아마, 아닐 겁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뭔가가 먼저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열심히 일해서 빨리 승진하고 싶다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여행이나 노후 대비 등을 하고 싶은 욕구와 그에 따른 감정이 먼저 있었을 겁니다. 이성은 바로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선택할 때 비로소 필요합니다.
재생 중지. 맞아, 그럴듯해! 내가 뭔가를 꼬치꼬치 따지는 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야. 욕망이 먼저 시동을 걸고, 이성은 그 욕망을 어떻게 채울지 나중에 고민하는 게 순서지. 그러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틀렸어.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오히려 현실을 잘 설명하는 거 같아.
다시 재생. 『오성에 대하여』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헤친 책입니다. 그의 주장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흄은 이성보다 습관과 경험에 주목했습니다. ‘2+2=4’나 ‘삼각형의 내각에 합은 180도’ 같은 지식은 이성만으로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같은 건 논리적으로 따져서 아는 게 아닙니다. 이런 건 비슷한 현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과거에 그랬더라도 앞으로 계속 그럴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자연이 늘 같은 현상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은 과학적 추론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경험이나 논리로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이유는,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인상을 얻고, 이를 기억으로 저장합니다. 이런 인상들은 생각을 만드는 원본 역할을 하죠. 인상과 인상의 연결은 상상력의 몫입니다. 상상력은 생각들을 서로 비슷한 것, 가까운 것, 원인과 결과로 묶어 연결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된 생각들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할 때마다 반복됩니다. 우리는 ‘불에 가까이 가면 뜨겁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습관이 만들어 낸 예상일 뿐입니다. 조명으로 만든 가짜 불을 조심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관성은 경험할 수 없는 것까지 함부로 판단하도록 만듭니다. 신, 자유의지, 사물의 본질 등은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인데도 우리는 마음의 관성과 신념에 이끌려, ‘있다/없다’ 또는 ‘참/거짓’을 단정 짓습니다. 흄은 바로 이런 독단적인 태도를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 중 흄이 없다고 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너무 충격적이라 마지막에 공개합니다.
재생 중지. 하여튼 우리 강사님은 연기력이 너무 풍부해. 충격적인 그것이 알고 싶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노트에 없는 내용을 빼곡하게 채워 적었다.
다시 재생. 흄은 인과 법칙도 의심합니다. 그것 역시 법칙이 아니라, 반복적인 경험이 만든 마음의 습관일 뿐입니다.
재생 중지. 말도 안 돼. 볼펜을 들고 있다가 놓으면 떨어지잖아! 볼펜을 놓는 행위가 원인, 떨어지는 게 결과. 원인과 결과 사이엔 인과 법칙이 있는 거잖아. 흄은 중력도 모르나? 만유인력의 법칙도 모르면서 철학을 하다니!
다시 재생. 여러분, 내일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뜰까요, 서쪽에서 뜰까요? 지구의 자전과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건,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 사이에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는 아무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같은 현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탓에 두 사실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때 습관과 경험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흄의 통찰을 계승해 후대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확률적 사실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확률적 사실이란,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연현상이라고 해도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거죠. 요컨대, 흄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필연적 진리로 인정하지 않고, 가능성으로 바꾼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재생 중지. 맞는 말이다. 당구만 봐도 그렇다. 흰 공이 굴러가서 빨간 공을 치면 움직인다. 이건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흰 공과 빨간 공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늘 그래 왔으니까, 섣불리 믿어 버린 건 아닐까. 흄의 말대로 그건 그저 인간의 인식 습관일 수도 있다.
그동안 나는 습관에 따라 살면서도 사실과 진실에 따라 살았다고 믿어왔다. 익숙함은 앎의 감옥이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다면, 그게 옳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의심하라! 그러자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건 팩트야!'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던가. 큰 목소리와 과장된 손짓은 남을 속이기 위한 쇼는 아니었나. 반대로, 내가 보지 않았다고 무조건 거짓으로 몰아붙이진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 경험했다면 그 역시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습관과 경험에 따라 비슷한 것, 가까운 것, 원인처럼 보이는 것을 진리로 믿었던 내 모습이 보인다. 이런 마음 작동법에 따라 나는 진실을 떠벌리곤 했다. 막연하게 남들이 말하는 잘 사는 것, 행복 같은 말에 붙잡혀,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너무 많이 놓친 건 아닐까. 미래 불안과 과거 후회가 만든 재단 위에서 얼마나 많은 현재가 희생양이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떠밀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는 데까진 시간이 꽤 필요했다.
다시 재생. 우리가 철석같이 있다고 믿는 것 중, 흄이 없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게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 여깁니다. 나라는 자의식이 고정불변하게 자리를 지킨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생각, 느낌, 기억을 일관성 있게 가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흄은, 아무리 우리 마음을 들여다봐도, 그렇게 단순하고 한결같은 자아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건, 다양한 감각과 생각 그리고 기억이 하나로 잘 묶인 일종의 꽃다발에 불과하다는 거죠.
재생 중지. 나는 경악했다. 내가 그저 한 다발의 경험이라니! 영화에서처럼 유령이나 영혼이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살면서 겪었던 것들이 보기 좋게 엮인 것이, 그 잘난 나란다.
다시 재생. 예를 들어 보죠. 여러분은 사진을 보면서 기억을 떠올립니다.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행복한 기분에 젖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랍니다. 이 연속적인 경험들이 마음 작동법에 따라 다시 한번 비슷한 것, 가까운 것, 원인과 결과처럼 보이는 것들끼리 묶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드는 겁니다. 우린 그 흐름을 보고 '아, 이게 나구나' 생생하게 느끼고, 확신합니다.
흄은 마음을 극장에 비유했습니다. 이 극장에서 우리가 보는 건, 수많은 경험과 기억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각뿐입니다. 우리는 마음 극장에서 이런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출하는 감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재생 중지.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한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따라서 어제 흘러 인천 앞바다로 사라진 한강과 오늘 마포대교 아래를 흐르는 한강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강을 똑같이 한강이라고 부른다. 흄이 볼 때, 나라는 것도 한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제출 마감일이 코앞이라 책상에 앉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옳은가'를 모니터에 넣은 뒤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멍하니 화면만 봤다. 깜빡이는 게 커서인지, 나인지 몰라도 좋을 시간이 흘렀다. 깜빡깜빡. 나는 옳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깜빡깜빡. 나는 스쳐 지나간 경험들이 묶여 잠깐 모양을 이룬 구름인지도 모른다.
광화문에 있는 동상이 떠올랐다. 나는 내 자신이 동상처럼 우뚝 서 있다고 믿어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말이다. 남들이야 뭐라든, 긴 칼 옆에 차고 나는 나를 올곧게 지켜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세월이 가르쳤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보장하지 않는다.
'나는 옳은가'라는 주제를 처음 대했을 땐, 내가 옳은 사람인지, 글러 먹은 사람인지만을 생각했다. 나 그 자체에 대해선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막상 문장을 파고들면, 문제는 항상 나였다. 나라는 건 곱씹을수록 물컹거려서 뱉을 수밖에 없는 이물질 같았다. 내가 흔들리니까, 옳으면 어떻고, 그르면 어떠냐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만약 우주가 텅 비어, 달랑 나 하나만 있다면 옳고 그름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옳고 그름을 끝끝내 판단하려던 이유는, 바로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숲속 현자는 그 누군가를 우주까지 넓혔다. 그랬더니 나를 꾸미거나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명상에서 호흡에 집중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호흡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실시간으로 접속하고 있는 우주의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죽고 난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그 생명력이 지금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 호흡이 있는 한 나는 살아있다. 이 호흡이 있는 한 나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내 영혼이 숲속 샘물처럼 상쾌한 행복한 날에도, 내 영혼이 한여름철 음식쓰레기 같은 우울한 날에도, 이 호흡만 있으면 나는 여전히 우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호흡은 옳다는 이유로 나를 칭찬하지도, 틀렸다는 이유로 나를 떠나지도 않는다.
세상일이 뒤틀릴 때마다, 그 책임에서 나를 빼내야 할 때마다 들먹였던 당신은, 결코 애정 담긴 존칭이 아니었다. 나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쓸 아무개였다. 내가 아는 선배는 평소엔 친근한 말투와 표정을 하다가도,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검지로 얼굴을 찌르면서 ’당신 말이야‘ 소리쳤다. 그 선배가 당신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 모두 죄인이 되어 버렸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필 재수 없게 내 눈에 걸린 사람들이 누명을 썼다. 나는 일을 주도하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결코 틀릴 수 없었고, 따라서 삿대질과 당신이란 호칭은 더 사나웠다. 이제야 알겠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서운한 마음이 특히 많이 쌓이는 건, 이해와 용서 대신 이런 억울함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은퇴 무렵, 나를 경멸하듯 쳐다봤던 후배들도 갖가지 억울한 사연이 있을 테다. 꼴좋다는 속마음이 눈빛에 담긴 건 내 탓도 있다.
인간은 지고지순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말로는 데이터와 논리 그리고 경험을 요구했지만, 그건 포장이었다. 내심 포기할 수 없는 건 '옳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었다. 물론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핏덩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배우고 익힌 건 서로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대뇌피질에서 무제한으로 달리고 있는 나의 오만과 편견을 인정한다면, 이젠 좀 달라져야 한다.
흄은 이런 나의 마음을 잘 설명했다. 그가 말한 철학의 목적은 생활 태도를 좋게 바꾸고 악을 끊어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도 진실의 대변인처럼 행동하는 것만큼 악한 짓거리도 없다. 이런 악행을 끊으면 삶은 자연스럽게 좋아지지 않을까.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초능력. 그럼에도 이웃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초능력. 매 순간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초능력. 이런 초능력 덕분에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악행을 그만두고 조금씩 개선되는 삶을 누리고 싶다. 이런 바람을 이루어 줄 마법의 주문을 써본다.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을 때, 더 틀리기 쉽다.
그래도 괜찮다.
우주는 언제나 끄떡없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 덕분에 새로운 나를 만나
다시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