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와 우리가 되고 싶은가 1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by life barista

귓구녕이 맥혔냐


강사는 자신이 엄청난 늦둥이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 연세 마흔여덟 살에 얻은 아들로, 말 그대로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키운 귀한 아들이다. 대충 계산해 보니, 강사 어머님은 우리 부모님보다도 연배가 위다.


어머니께서 글을 읽지 못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가정통신문을 받아 왔는데, 학교에서 배운 것 좀 자랑하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크게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씩씩한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저로선 어머니의 속사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굉장히 주의 깊게 들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준비물, 학급비, 소풍날 등을 빠짐없이 기억하기 위해 그러셨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늦게 태어난 아들이 자신도 모르는 글을 깨쳐 또랑또랑하게 읽는 모습에서 어머니는 제가 짐작할 수도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을 겁니다.


나는 강사의 어머니께서 느끼셨을 감사와 자랑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과 긴장감을 함께 느꼈다. 문맹이라는 말은 30년여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할머니도 글을 읽지 못하셨다. 할머니께서 딸네, 그러니까 우리 집에 오신 건 내가 고2 때였다.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신 채, 전화기 옆에 있던 메모지 한 장을 흔드셨다. 아가, 이것 좀 읽어봐봐. 할머니에게 평생 아가였던 나는, 한일전 축구 경기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아가답게 할머니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귓구녕이 맥혔냐!


할머니의 사투리 섞인 고함에 나는 벌떡 마루에서 일어났다. 아이참, 할머니, 왜 소릴 지르세요! 왜요, 왜 그래요! 때마침 우리나라의 득점 찬스였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소리만 질렀다. 할머니보다 열 배는 더 크게. 당시 나는 사람과 짐승이 반반 섞여 있는 남자 고등학생이었다. 할머니는 그날 바로 시골로 가 버리셨다. 다시 할머니를 뵌 건, 요양병원에서였다.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 그러니까 당신의 딸도 못 알아보셨다. 나를 못 알아보신 건 당연했다. 아가는 슬펐다.


나중에 알았다. 할머니가 흔든 종이에는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언니의 부고가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언니의 발인 날짜가 궁금하셨다. 언니의 죽음에 목 놓아 우시는 할머니가 장례식 일정을 잘 챙기실 리 없었다. 다시 엄마가 급히 전화를 건네받아 메모하셨다. 당연히 엄마가 장례식장에 모시고 가실 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엄마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하나밖에 없는 언니가 언제 차디찬 땅에 묻히는지 궁금해 애가 탔다. 그때 할머니 목소리가 왜 그렇게 컸는지, 그리고 왜 설움에 북받쳐 우셨는지 내가 안건, 요양원에서 돌아올 때 엄마에게 이런저런 얘길 듣고 나서였다. 그때까지 나는 할머니가 글을 읽지 못하신다는 걸 몰랐다.



그들에 대해 모릅니다


강사는 이번 달 글쓰기 주제를 밝혔다. ’나는 누구와 우리가 되고 싶은가?‘ 나에게서 시작해 우리로 확장되는 시간이다. 우리? 참 오묘한 말이다. 각자도생,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생존하라는 말을 버젓이 하는 시대에 우리란 말은 속 빈 강정 같다. 사실 생존에 걸리적거리는 말 아닌가.


그렇지만 내가 이 수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우리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위대한 나를 선언했을지라도 그 속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딱히 나 혼자 만든 건 거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누린 대부분은 우리에게 신세진 것들이다.


내가 속해 있는 무리를 우리라고 부른다. 내가 없으면 우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무리 중에 그냥 끼어있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런 우리에겐 결속력이 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한 무리가 튼튼한 우리다. 우리 가족, 우리 마을, 우리 사회, 우리나라, 우리 행성처럼. 다시 말해, 내가 마음을 주지 않은 무리는 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럴 땐 ’쟤네‘라고 부르며 한껏 거리를 둔다. 우리 가족만 빼고, 우리 마을부터 우리 행성까지는 실상 쟤네와 다름없이 느껴진다. 씁쓸하다.


이번 달 주제에 맞춰 제가 추천하는 책은 레이먼드 카버가 쓴 『대성당』과 마사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입니다. 『대성당』은 레이먼드가 쓴 단편 소설집인데요, 여기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원치 않은 직업에,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탓하면서 술에 절어 삽니다. 어떤 사람은 실직 후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 결혼생활로 인해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습니다. 각자 알아서 산다고 하지만, 실상 각자의 무덤에서 죽어가고 있는 듯한 삶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하면서, 툭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있나요? 아니면 저런 모임이라면 나도 끼고 싶다 하는 모임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제 눈에 안경을 고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제가 엄마에 대해 잘 몰랐던 것처럼요.


레이먼드의 소설들은 내 옆에 살고 있는, 어쩌면 우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사람들의 속사정을 그립니다. 그 중 『대성당』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자기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습니다. 아내와 그 친구는 자기 음성을 담은 테이프를 벌써 몇 년째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그 친구는 남자입니다. 심지어 맹인입니다.



내키지 않는 사람


미국 사람들이 개방적이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한다, 이런 말을 듣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내의 남자 친구, 게다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 집으로 초대한다? 이건 나 역시 마음에 켕긴다. 서로의 목소리를 수년 간 주고 받았다면 보통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단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마지막 날, 그 맹인은 얼굴을 만져봐도 되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승낙했다. 그녀는 내게 그가 손가락으로 얼굴의 모든 부분을, 코를 만졌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목까지도!


여기서 그녀는 아내다. 아무리 결혼 전 이야기라지만, 이 정도 사건이 있는 아내의 남자 친구를 환영하기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나름 준비한다. 일단 그는 자기가 맹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볍게 모아본다. 영화에서 봤던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절대 웃지 않는다. 그들은 안내견을 따라 다닌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걷는다. 이상한 글도 떠오른다.


언젠가 나는 맹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기가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겨우 그 정도, 맹인에 대해서는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우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보통 내 예상 밖에 있다고 강사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예측불허인 셈이다. 의외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내 입에 맞는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행동, 내가 짐작할 수도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적이 되기 십상이다. 낯선 사람은 왠지 날이 선 무서운 사람 같다.


『대성당』의 맹인도 그랬다. 그에겐 까만 선글라스도, 안내견도, 지팡이도 없었다. 심지어 재떨이가 다 찰 정도로 줄담배를 피워댔다. 가뜩이나 아내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거북한데, 그는 맹인의 평균을 비웃는 듯 보였다. 불행하게도 맹인의 아내는 최근에 암으로 죽었다. 만약 그가 부인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주인공은 체면이고 뭐고 그에게 싫은 티를 팍팍 냈을 것이다. 동정심만이 주인공의 인내심을 아슬아슬하게 살려냈다.



우리가 쏟아진다


이 두 사람은 과연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우리라는 말이 언제 나오나 신경 썼다. 눈 뜬 주인공과 맹인 사이에 우리가 될 만한 어떤 교집합이 있을까? 나아가 이 둘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이들을 단단한 우리로 묶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유별나고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고 싱겁게, 그리고 한꺼번에 우리가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양껏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식탁 위에 있는 것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어치웠다.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먹었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우리는 그 식탁 위를 샅샅이 핥아먹었다. 우리는 치열하게 먹었다.


지금까지 주인공은 맹인에게 거리를 두고 내심 불편해 했다. 그는 맹인에 대해 전혀 몰랐고, 이해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맹인의 이름은 로버트였다. 하지만 그는 로버트를 부를 일이 없었다. 대화도 아내와 로버트 사이에서만 오고 갔다. 그는 끼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에게 로버트는 아내의 애매한 친구 혹은 앞을 못 보는 이상한 손님일 뿐이다. 결코 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위 문장에서만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일곱 번이나 등장한다. 우리라는 말은, 이 장면 전까지 우리 집에 한 번, 그리고 주인공과 아내를 묶어 부를 때 또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맹인 손님까지 포함해 우리가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식사하는 모습은 식구처럼 스스럼없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같이 밥을 먹어온 식구. 우리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샅샅이 핥아, 치열하게 먹는 중에 불쑥 솟아올랐다.



식구와 회식


도대체 함께 먹는다는 것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그 힘은 어떻게 불편한 각자를 우리로 바꾸어 놓는 걸까. 작가는 주어 반복과 과장된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던 걸까.


질문 끝에 방금 쓴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글자만 보면 식구는 음식과 입을 뜻한다. 여기에 사람을 넣어야 식구의 본뜻이 살아난다. 고된 하루 일을 끝낸 사람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상에 둘러앉아 사이좋게 저녁을 먹는 모습.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이들이 식구다. 한솥밥, 집밥, 밥심, 밥줄, 밥벌이. 이 단어에는 생계와 노동으로 엮인 식구의 삶이 수북하게 담겨있다.


식구와 밥은 우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말인 듯하다. 『대성당』의 주인공과 맹인은 생전 처음 본다. 인간은 모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불편해한다. 그 사람이 나를 헤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본능적인 두려움은 마음에서부터 풀어져야 한다. 허리띠를 풀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것만큼 마음을 풀어주는 마법은 없지 않을까. 우리가 되는 데는 화려한 말이나 특별한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샅샅이 핥아, 치열하게, 함께 먹는 것으로 우리는 생겨난다.


출신은 못 속인다. 평생 회사원으로 살아온 터라, 이쯤에서 회사 회식 장면이 떠오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잘 차려진 음식과 시끌벅적한 분위기 때문에 회식 자리에는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난다. 회식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영락없는 식구다. 그러나 속사정은 전혀 딴판이다.


회식은 함께 먹는 행위로 계급과 규율을 확인하는 의례에 가깝다. 국민의례 때 자리에서 일어나 태극기를 올려다보고 가슴에 손을 얹는 것처럼, 회식 때에는 조직 내 서열을 올려다보고 알쏭달쏭한 술 법도를 지켜야 한다. 국민의례 때 그대로 앉아 있거나, 태극기를 노려보거나, 팔짱을 끼고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회식 때에도 상사가 왔는데 그대로 앉아 있거나, 그의 얼굴을 노려보거나, 그의 말에 시큰둥하면 안 된다.


계급과 규율은 인간을 조직한다. 식구마저 조직원으로 만든다. 회사 회식은 식구로서 삶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직에 맞는지 그 쓸모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쓸모를 먹는 중에 평가받는 일이 유쾌할 리 없다. 코로나도 한몫했지만, 이제 강압적인 회식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거룩한 밥상머리에서 서로 속이는 짓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내심 담합한 건 아닐까. 하긴 이젠 알 때도 됐다. 밥은 식구끼리 먹는 걸로 하자.



대동소이


함께 먹으면서 주인공은, 맹인이 자신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로버트는 자기 접시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는 능숙하게 고기를 자르고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감자와 버터 바른 빵은 물론 작은 콩도 쉽게 집어 먹었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사용했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나와 비슷했다.


시력으로 분리되었던 각자에서, 먹는 모습이 비슷한 우리로 가까워질 무렵, 그는 로버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지 않았을까. 원래 닮은 사람끼리는 끌리기 마련이니까. 그는 자기 이름과 듣기 좋은 말을 기대하면서, 아내와 로버트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그 덕에 그는 맹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로버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로버트 부부는 판매대행업을 같이 했다. 로버트는 아마추어 무선기사이기도 하다. 세계 구석구석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있다. 그의 집엔 컬러 TV와 흑백 TV가 모두 있다. 웃긴 일지만, 그는 항상 컬러 TV를 켠다. 놀랍게도 로버트는 처음 와본 집의 TV가 컬러 TV라는 걸 정확하게 맞춘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는 마. 그냥 아는 거야.


보지 않고도 그냥 아는 방법이 있구나, 나 또한 흥미로웠다. 하긴 우리도 가끔 이런 말을 쓰지 않던가. 몸이 안다,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말로 딱히 뭐라 할 순 없지만 그냥 아는 것들. 어쩌면 이런 앎이 깜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진짜 지식일 수 있다.


문화적 차이가 커서 꺼림직했지만, 나는 주인공과 로버트가 대마초를 나눠 피우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괜한 오해는 사절한다.


“로버트, 이런 거 피우는 줄은 몰랐어요.”
“이제부터 피우는 거지. 모든 일에는 처음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별 느낌이 없네.”


이런 거 피우는 줄 몰랐다고 물은 사람은 아내다. 오랫동안 음성 테이프를 주고받을 만큼 흉금 없이 지낸 사람도 전혀 몰랐다. 당연하다. 로버트는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리 미국 일부에선 합법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겐 매우 곤란하고 꺼림직한 것이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주인공의 권유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내가 놀랐던 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불법인 것을, 이제 막 식사 한번 같이 한 사람이 권한다면? 고개가 알아서 절레절레 흔들린다. 그렇다면 로버트는 왜 그랬을까.


아직, 자네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어. 젊은 양반. 괜찮다면 말이야. 자네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도 깨어 있겠네. 우리는 서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


이유는 간단했다. 로버트는 단지 그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로버트는 그가 뭘 보고 뭘 즐기는지, 문제 삼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이 가진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도 맹인으로 살아온 로버트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은 자신의 눈을 대신해 세상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나는 여기서 더 놀랐다. 나의 약점, 나의 치부일 수 있는 신체장애를 그는 받아들였다. 단순한 수용에 멈추지 않았다. 앞을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자기 자신을 옥죄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히려 볼 수 없는 사람만의 방법으로 세계와 삶을 항상 배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활짝 열면서 말이다.



공평한 인생


소설 제목이 왜 『대성당』인지 의문이 생길 무렵, 주인공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한 채널에서 대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 중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 유명한 대성당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새파란 하늘로 치솟은 첨탑이 화면을 뚫고 나올 듯 또렷하다. 다큐멘터리 해설가는 대성당에 대한 역사와 지난한 건축 과정을 설명한다. 주인공과 로버트는 화면 속 대성당의 겉모습을 함께 보진 못한다. 그러나 해설가의 설명은 함께 들을 수 있다.


한 집안이 대대로 대성당 하나에 매달린다는 것도 알겠어. 이것도 방금 저 사람에게 들은 거고.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문장이 살을 파고들었다. 살로 읽은 문장은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그들은 평생을 바친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삶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맹인이든 아니든 삶의 완성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하다.



맹인에게 보는 법 배우기


문득 주인공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누가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지 개념이 잡히느냐는 거죠.


이건 로버트를 놀리는 질문이 아니다. 그는 보지 못하는 로버트 앞에서 무심코 틀었던 TV 내용에 마음이 쓰였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이해를 돕기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주인공은 로버트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 로버트도 그의 마음을 알았다. 로버트는 솔직히 자신은 대성당에 대한 감이 없다면서, 주인공에게 설명을 부탁한다.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대성당을 설명하는 건 가능한가?


나는 TV 화면의 대성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 일에 내 목숨이 걸려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미친 사람에게 내 목숨이 달렸다면.


주인공이 로버트에게 얼마나 마음을 쏟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먼저 그는 대성당의 외관을 설명한다. 버팀도리, 첨탑, 창문, 프레스코화를, 눈에 보이는 대로 죄다 말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로버트에게 대성당을 느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결국 그는 눈으로 봐야지만 자신이 말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만다. 그러곤 사과한다. 이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간절했지만,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죄송하다는 주인공의 말에 로버트는 뭘 좀 물어봐도 괜찮겠냐며 묻는다.


나는 그저 자네에게 그게 어떤 형태로든 신앙심이 있느냐고 묻고 싶은 거야.


로버트는 그에게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 오히려 스스로 본다고 하면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을 끌어냈다. 신앙심!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마음, 보이지 않을 때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마음. 로버트는 그에게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을 가르친다.


그는 내 손, 펜을 쥔 손을 찾았다.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시작하게나, 이 사람아, 그려봐. 그가 말했다. 그려봐. 뭘 하자는 건지 알게 될 거야.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이겠네. 괜찮아. 내가 말한 대로 시작해 보게나.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려봐.


로버트는 그에게 괜찮다며 계속 그려보라고 다독였다. 두꺼운 종이에 그려진 네모와 지붕 그리고 첨탑. 그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여전히 멋지다, 끝내준다며 그를 응원한다. 그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팔이 저릴 정도다. 잠시 쉬는 동안, 로버트는 종이 위를 천천히 더듬는다. 우리가 함께 그린 대성당을 꼼꼼하게, 음미하듯 느낀다.


다시 그들은 함께 대성당을 그려 나간다. 어느 순간, 로버트는 감탄한다. 그가 이제 안다고 흡족해한다. 마지막으로 로버트는 그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다. 속여선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주인공은 눈을 감고 그린다. 로버트는 이제 된 것 같다고 한다. 그에게 한번 보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주인공은 전혀 뜻밖에 행동을 한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로버트는 그가 눈을 감고 있는지 모른다. 로버트가 묻는다. 어때? 보고 있나? 주인공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머리로는 자신이 집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집에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이 색다른 느낌은 무엇인가.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토요일 연재
이전 15화나는 옳은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