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빨갱이는 죽여도 돼!
이 구호를 아시나요? 저는 이 말을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었습니다. 빨간 모자와 군복을 입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저 날 선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습니다. 저 말은 우리 사회를 말랑하게 바라보던 제 순진함을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도대체 빨갱이가 무슨 뜻이야? 밑도 끝도 없이 아직도 철 지난 색깔론이야? 우리나라에는 엄연한 사법 절차가 있는데, 죽여도 된다니? 저런 끔찍한 말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막 해도 되는 거야? 너무 무식해서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창피하네.
제 마음에선 강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평소, 철창에 갇혔던 흉측한 괴물이 탈출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계속 우리 모두의 나라로 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아니, 저런 사람들과는 더 이상 우리로 살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시위가 끊이지 않던 2024년 12월, 살기 등등했던 제게 누군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권했습니다. 책에는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제겐 우아해질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제 마음은 차라리 시퍼런 칼춤에 가까웠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적대감에 날뛰던 마음도 지치더군요. 이제 저는 다만 혐오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이 책은 제게 구조선과 같았습니다.
기억난다. 나 역시 저 피 맺힌 구호를 뉴스에서 봤다. 너무나 확신에 찬 얼굴로 인터뷰를 하는 분도 있었다. 어르신의 주름에는 혐오를 넘어 분노, 나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살육의 의무감마저 서려 있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곤 씨가 말라버린 불모의 땅처럼, 노인의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쓴 누스바움은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의 걱정, 불안 속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내내, 혐오와 차별의 말을 쏟아냈던 사람입니다. 혐오와 차별은 그의 선거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혐오 속에 숨어 있던 두려움을 선거판에 끌어들였습니다. 이민자, 성소수자, 여성의 가면을 쓴 공포에 쫓겨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차별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두려움이 합리적인 생각을 멈추게 한다는 걸 잘 아는 누군가가 설계한 선거 전략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불안과 절망에서 저자는 두려움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동시에 갖게 됩니다. 그 희망은 문장이 되어 지금 우리가 읽을 책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만든 분노, 혐오, 시기가 어떤 희망을 낳은 걸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떠올리면 여러분도 그 희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저자인 누스바움은 법철학자이면서 인간 감정의 전문가이다. 그녀의 철학이 현실을 제대로 짚어내고 실질적인 대안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삶을 짊어진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을 심도 있게 연구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감정을 인간 행동의 에너지라고 부른다. 감정이 만든 에너지는 자기 안전과 만족에 대한 정보를 처리할 때마다 사사건건 간섭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나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해 생각하고 이에 대비할 때마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두려움은 감정의 왕이다. 우리가 알몸으로 태어난 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언제 안전해질지 알 수도 없다. 나의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다. 이에 인간은 생존용 두려움을 생애 초기부터 탑재한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이면서 동시에 최후의 보호막인 셈이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약한 인간은 벌써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막강한 두려움의 힘은 다른 감정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두려움은 분노, 혐오, 시기 같은 나쁜 감정에 불을 붙인다. 두려움은 어떤 문제의 원인을 차분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대신 두려움은 가장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한다. 없애야 할 적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두려운 이유는 바로 그 적 때문이다. 따라서 저 적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는 곧 행복해 질 것이다.
사람들은 삶의 기준이 낮아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대면하기보다 절대자인 악당에게 매달리거나 환상을 품는다.
절대적인 악당.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나선 어르신들에게 그것은 바로 빨갱이가 아닐까. 두려움이 어르신들로 하여금 죽여도 되는 빨갱이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두려움은 언제부터 그들을 지배했을까? 그 두려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살인하지 말라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적 명령마저 굴복시킬 수 있었을까?
자기 삶이 갑자기 나빠지면, 우리는 그 원인부터 찾습니다. 먹고 살기가 빡빡한 정도가 아니라, 이러다 굶어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까지 들면, 사실 합리적인 상황 판단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누스바움은 이때 만들어진 두려움이 절대 악당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빨갱이가 이런 나쁜 악당이라면,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 사람만의 특별한 사연이 분명히 있지 않겠냐고 강사는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을 이장이 청년 두 사람과 함께 급히 할아버지를 찾은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고 합니다. 주무시다 깨신 할아버지는 무례한 방문의 자초지종을 비몽사몽 들었습니다.
나라에서 할당이 떨어졌다카데요. 우리 마을만 사람 수가 모자라예. 머릿수를 채워야 비료하고 생필품도 제대루 준다 아입니꺼. 형님, 좀 도와주이소.
내가 뭘 우짜면 되노?
간단합니더. 요기, 손가락 지장 한 번 꾹 찍어 주이소.
할아버지는 이장 말만 믿고 붉은 지장을 찍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글을 몰랐습니다. 지장이 찍힌 종이의 정체를 아는 건, 글을 아는 이장뿐이었습니다. 거기엔 ’국민보도연맹 가입‘이라는 글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할머니는 밥이라도 먹고 가면 안 되겠냐며 흔한 배웅을 하셨답니다. 그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자, 할머니는 군청을 찾아갔습니다. 아들 친구였던 군청 서기는 갑자기 얼굴을 바꾸더랍니다. 그러곤 뭔가 작심한 듯 대답했답니다.
어무이, 더 이상 묻지 마이소. 지금은 찾지 않는 게, 가족을 지키는 길입니더.
백 방을 뒤지고 수소문한 끝에,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할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끼니마다 할아버지 밥을 떠 놓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 중에도 그 트럭에 실려 사라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가족들 모두 쉬쉬하며 가슴만 쥐어짰습니다. 이장과 청년 몇몇은 빚이 탕감되고 땅이 넓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반대로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삯바느질과 날품팔이로 간신히 숨만 붙어 지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당장 오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그나마 연한 나무껍질을 벗겨야 했습니다.
이제 마을은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졌습니다. 국가의 명령을 전달해야 했던 사람들, 그 명령에 따라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명령에 의해 죽은 사람들. 국가 권력은 마을 사람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바꿔버렸습니다. 대체로 가해자는 잘 살았고, 피해자는 못 살았습니다. 대체로 가해자의 아이들은 잘 배웠고, 피해자의 아이들은 못 배웠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피해자의 아이에게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꼬리표는 일자리까지 막았습니다. 가난은 대물림되었습니다.
강사의 이야기는 내가 할머니에게 들었던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아가야, 빨갱이는 무서워. 어느 날 빨갱이들이 몰려왔어. 죽창하고 몽둥이를 들고 씩씩거리면서. 네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마당에 자빠트렸지. 일어나려는 사람을 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막 때렸어. 죽창으로 허벅지하고 손등을 찌를 때마다 할아버지는 끊어지는 숨을 짧게 토했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그 사람 위로 엎어졌어. 죽이려면 같이 죽이라고. 그때 배속엔 아기가 있었는데, 그게 네 엄마다.
할머니의 눈은 반은 물에, 반은 억울함에 흔들렸다. 모진 상황에서도 엄마는 무사히 태어났고, 덕분에 나도 이렇게 할머니 말씀을 듣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엄마의 백일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왜, 그랬을까. 그 착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눈이 돌아갔을까. 왜정 때부터 우리 광산에서 나온 쇠붙이로 같이 먹고 살던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친척보다 낫던 우리 마을 사람들이 왜 하루아침에 우리더러 반동분자라고 소리쳤을까. 우리가 뭘 잘못 했을까.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어김없이 엄마에게 전화하셨다.
딸내미, 너 이번에도 빨갱이 찍을 거냐. 그러면 안 된다. 너는 억울하게 죽은 네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냐? 너 그럴 거면, 이참에 연을 끊자. ... 그러지 말고, 엄마 소원 좀 들어줘. 나라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이 엄마를 위해서, 빨갱이만은 절대 찍어선 안 된다. 알겠지? 대답해 어여. 얘는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울긴 왜 울어.
누스바움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을 이렇게 정리했다. 앞으로 닥칠 수 있는 나쁜 일에 대한 괴로움과 이를 물리칠 힘이 없는 무력감의 결합. 하긴 아무리 나쁜 일이 닥쳐도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일은 대부분 나쁜 일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던가. 내 쪽에서 두려움을 이기려면 우선 무력감부터 알아야 한다.
나쁜 일이라고 공책에 썼다. 그 옆에 강사의 어머니와 나의 조부모님을 동그라미로 그렸다. 그건 단순한 도형이 아니라 그분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굴과 나쁜 일 사이 여백에 벌어진 사건들을 적었다. 잔인한 폭력, 거짓말, 실종, 죽음. 나열된 사건을 연필로 까맣게 칠했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 위에 지우개로 국가라고 썼다. 그림자의 이름이 뼈처럼 하얗게 드러났다. 뚜렷하게 보이지만, 읽어선 안 되는 진짜 범인의 이름.
국가 앞에서 가족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먹먹했을까. 두려움은 무력감에 쓰러진 그들을 덥석덥석 집어삼켰겠지. 밥상에 올려진 남편과 아버지의 밥 위로 얼마나 많은 눈물이 쏟아졌을까. 어떤 언어가 이 상황에 맞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힘이 없어 더 두렵고, 두렵지만 여전히 억울한 삶이 그들의 살갗 아래 차곡차곡 쌓여, 결국 한이 되었다.
군인들은 전투에서 겪은 두려움을 이렇게 요약한다. 내 몸밖에 안 보인다! 우리 할머니가 당하신 일도 전쟁통에 벌어졌다. 강사의 어머니가 겪은 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자기 몸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자기 몸보다 소중한 자식들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란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우리 할머니들은 악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다, 너는 빨갱이 자식이 아니다, 빨갱이가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 빨갱이가 너의 원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사연들이 여기저기에서 넘쳤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친일과 독립,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 건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현재 우리 사회의 분열을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대결로 봅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념 대결로 입은 상처부터 먼저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을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이 되었지요. 그런데 가해자 쪽만 아니라, 피해자들도 오랜 기간 이런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은폐 과정은 오히려 사건의 충격을 마음 깊숙이 내면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겉으로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속으로는 더 분명해지는 법이니까요. 상처의 은폐가 내면화를 거쳐 자기 자신이 되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사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직접적인 피해자에다, 그 일을 직접 수행한 경찰이나 군인, 공무원, 정치인까지 더하면, 현재 우리 사회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국가 범죄로 인한 상처 아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친일 행적에 대한 갈등과 한국전쟁의 민간인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우리 사회가 거대한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를 대물림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밥상머리 교육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셨습니까? 저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까? 빨갱이라는 말을 둘러싼 잔인하고 억울한 이야기가 우리 어르신들이 밥상머리와 학교와 마을과 군대에서 진심으로 배운 유일한 사상교육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교육은 어떤 사람들을 윤리적 부상자로 만듭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런 윤리적 부상자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거대한 전쟁수용소일지도 모릅니다.
강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에 대해 말했다.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가족, 친구, 동료, 이웃을 치워 버립니다. 이게 두려움이 주는 가장 큰 해악입니다. 누스바움은 이때 필요한 것이,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능력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청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만든 분노와 혐오를 오랫동안 끌어안고 산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복수하길 원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위험 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사람을 조금 더 알고,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한다면, 그래서 나와 너를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공동선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의 집단적 분노는 사회적 정의를 위한 에너지로 쓰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려면, 그가 결코 잊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적어도 알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인생은 구체적인 사건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겪은 현대사의 구체적인 사건을 정확하게 알 때, 비로소 그 사건들에 휘말렸던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느낌을 현재 나의 삶에서 재생시키는 것만큼, 한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데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겁니다.
누스바움의 말대로 가정도 정치적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그 결과가 참담하단 말로도 부족하다. 그 비극을 내면의 상처로 이해하니,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겹다.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인생엔 있다. 너무 참혹해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일이 평범하고 수수한 우리 어르신들에게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릴 때부터 속으로 삼킨 복수의 칼은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집단적 증오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감정을 만들어 가기 위해선,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외치는 그들의 인생에 대해 좀더 알아야 한다. 그들의 갓난아이 시절을, 어린 시절을, 학창 시절과 청년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이 땅에서 마땅히 함께해야 할 한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은 아주 어릴 때 생겨나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인간에게는 연약한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보답하려는 심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려움 때문에 생긴 분노와 혐오를 누그러트릴 수 있는 돌봄이 아닐까.
적절한 교육과 안전한 환경이 보장되지 못하면 아이들은 두려움의 맹습을 견디는 균형 감각을 키울 수 없다. (…) 국가는 어떻게 두려움을 완화시키고 민주적 호혜를 보장하는 촉진적 환경이 될 수 있는가?
두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적절한 교육과 안전한 환경을 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분노와 혐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두려운 환경에 놓인 노인들에게 적절한 지원과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겪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분노와 혐오를 줄이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은, 우리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앞을 볼 수 있다. 운 좋게 글도 읽을 줄 안다. 그래서 나는 우리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나의 이해와 예상에는 우리가 함께 꿈꾸는 좋은 것도 나란히 있는가? 아니면, 그건 각자도생에 번거롭다며 못 본 채하고 있는가.
나만 잘 살자고 다짐한 눈에는 세상이 정글로, 이웃이 적으로 보인다. 시각장애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은 그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다. 각자도생은 민주주의를 그만하자는 말과 다름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옹알이는 언제쯤 그만두게 될까.
광화문에서 내렸다. 광장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태극기가 펄럭인다. 굵게 주름진 얼굴들이 가로등 불빛에 하나둘씩 드러난다. 나는 저들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러려면 나는 무엇을 믿고, 바라봐야 할까.
나의 꿈은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가?
우리의 꿈은 나를 의미 있게 만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