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여러분, 드디어 마지막 수업입니다. 그동안 함께 읽고 쓰고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주했던 질문들은 이렇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나는 옳은가, 나는 누구와 우리가 되고 싶은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온 마지막 질문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가'입니다.
제가 이번 수업을 통해 느낀 건, 읽기와 쓰기가 여러분께 적지 않은 변화를 주고 있단 사실입니다. 캄캄한 고정 관념에 햇빛이 들어오고, 무사통과하던 생각의 관성에 검문검색이 시작되었습니다. 내친김에 저는 오늘 마지막 질문을 통해 이 변화들을 하나로 이해하고픈 욕심이 생깁니다.
수많은 사람과 사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직접 선택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밀려 나머지를 선택했든, 우리 삶은 그때마다 내린 선택의 퇴적층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을까요. 그 선택에 있어 빠트려선 안 될 중요한 조건을 이제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시한부 인생 또는 사형수 같은 신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를 찾고, 돌보고,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우리로 넓어지길 바랍니다. 결국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죽는데 우리는 왜 답도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걸까요?
이런 물음 끝에 저는 마지막 책으로 카뮈의 『이방인』과 플라톤의 『파이돈』을 선택했습니다. 카뮈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불립니다. 실존주의는 지금 여기서 숨 쉬며 살고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기준으로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먹거나 웃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나와 여러분이 먹고 자고 울고 웃습니다. 개라는 분류는 짖거나 뛰거나 털이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집 강아지 누리가 짖고 뛰고 털이 빠집니다. 실존주의는 지금 여기서 이유 없는 삶을 견디고 있는 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철학, 종교, 윤리, 관습, 국가, 민족으로 그 사람을 걸러 내지 않습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한계상황에서 있는 그대로 삶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실존주의입니다.
『이방인』은 세 가지 죽음에 갇힌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죽음, 주인공의 살인 그리고 사형. 이 죽음들 사이에 놓인 주인공 뫼르소의 생각과 감정을 천천히 읽으면서, 죽음이라는 삶의 결정적 조건을 내 앞으로 가져와 천천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제아무리 천하에 나쁜 불효자식이라고 해도 어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날도 모른단 말인가. 좀 더 읽다 보니 주인공 뫼르소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울지 않는다. 매장 전에 당연히 봐야 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않는다. 왜냐고 묻자, 모르겠단다. 엄마의 관을 코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운다. 장례식 전날 밤엔 밤샘이 관례인데 곯아떨어진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실컷 잘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낀다.
이 정도면 내가 말을 안 한다. 어제 엄마를 땅에 묻고 돌아온 아들 뫼르소의 감정은 슬픔이 아니다. 그는 심심하다. 그는 해수욕장으로 가 수영을 즐긴다. 바다에서 여자를 만나 관능미를 즐기고, 저녁엔 그녀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본다. 뫼르소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그녀조차 상중(喪中)이냐며 매우 놀란다. 매우 놀랄만하다!
뫼르소에게 실컷 불효자라고 욕을 한 건, 사실 도둑이 제 발 저린 탓도 없지 않다. 뫼르소처럼 나도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잘난 형 때문이다. 형은 우리나라 최고 명문 의대를 나왔다. 총동문회는 동네 입구에 '장하다, 면목의 아들!'이란 현수막까지 걸었다. 형은 개인병원을 차려준 부잣집 외동딸과 결혼했다. 그분이 그 잘난 나의 형수님이다.
형과 형수는 엄마를 모시지 않았다. 동생인 우리 부부가 모셨다. 엄마는 대장암 말기에 치매 증세까지 보였다. 암이 속살을 파먹을 때마다 엄마는 신음과 울음을 섞어 토하며 주름지고 야윈 몸을 비틀었다. 밤이면 식은땀이 메마른 주름살을 타고 흘렀다. 형에게 어머니 상황과 우리 형편을 말했다. 사실상 구조요청이었다. 형의 응답은 간단했다. 여력이 없어. 요리사와 가정부를 따로 둔 형은 어머니를 모실 여력이 없었다. 넓은 마당과 양지바른 3층 양옥집을 통째로 쓰는 형은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안 됐다. 진통제로 엄마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의사 형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는 형의 말에 격분하면서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번에도 형은 간단하게 협박을 물리쳤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머니를 요양원에 버린 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통곡했다. 마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아니 내가 엄마를 죽인 것처럼, 미안하다고 수도 없이 되뇌며 용서를 빌었다. 아내는 지금이라도 다시 모셔 오자며 같이 울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형수의 타박이 생각났다. 형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매달 보내주는 돈이 얼만데 어머니 꼴이 이게 뭐냐. 그 잘난 월 10만 원이 생각나자, 나는 눈물과 콧물을 표독스레 닦았다. 그리고 형처럼 말했다. 우린 여력이 없어.
그로부터 2년쯤 지나 엄마가 돌아가셨다. 형과 형수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찾아 뵙는데, 형 얼굴도 못 알아보셨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치매 환자가 십여 년 만에 만난 아들을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형이 너무 변해 나도 못 알아볼 뻔했다고.
엄마를 묻고 돌아와 내가 내뱉은 첫 마디는 피곤하다는 거였다. 뫼르소와 다를 바 없었다.
도대체 왜 죽인 거야? 아무리 봐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당방위인가? 죽은 아랍인이 칼을 뫼르소 쪽으로 쳐들었잖아. 아니지. 피해자는 누워 있었어. 게다가 뫼르소와는 꽤 멀찍이 떨어져 있었어. 그가 벌떡 일어나 칼을 들고 뫼르소에게 달려든 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뫼르소가 사람을 죽일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작가가 이게 살인 동기라며 계속 가리키는 게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카뮈는 이렇게 묘사한다. 살인이 벌어진 그날에 태양은 엄마의 장례식날과 똑같은 것이었다. 태양은 뫼르소를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는 숨 막히는 열기를 피할 곳을 찾는다. 그는 친구와 함께 갔던 바위 그늘에 시원한 샘물을 떠 올린다. 그런데 그곳에는 좀 전에 친구를 칼로 찌른 아랍인이 먼저 와 누워 있다.
뫼르소는 자기가 돌아서기만 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태양이 진동하는 해변 전체가, 뫼르소가 돌아서지 못하도록 막는다. 불로 지지는 듯한 태양의 열기는 한층 더해진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서늘한 그늘 샘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인다. 결과적으로 아랍인에 그만큼 가까워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칼을 뽑아 태양 빛 속에서 뫼르소를 향해 쳐든다. 햇빛이 강철 위에 반사된다. 칼에 반사된 빛은 긴 칼날이 되어 뫼르소의 이마를 쑤신다. 태양에서 심벌즈 소리가 난다. 아랍인의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이번에는 뫼르소의 두 눈을 후벼 판다. 모든 일이 꼬인 건 바로 그때다.
나의 전 존재가 팽팽하게 긴장했고 나는 손으로 권총을 꽉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날카롭고도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태양이라고? 태양 때문에 죽였다고?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나는 태양에 집중해 다시 이 장면을 읽었다. 문장 하나가 걸렸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 죽음과 똑같은 태양. 나는 그 태양을 찾아 다시 앞으로 갔다.
엄마의 장례식날, 태양은 땅으로 쳐들어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은 아스팔트를 녹였다. 길은 진창으로 검게 변했다. 검은 길 위로 검은색 영구마차가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검은 상복과 검은 넥타이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어둡게 걷는다.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은 땅을 온통 죽음의 색으로 칠해버렸다. 그날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이 마을이 비인간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죽음이 눌어붙은 마을이 인간적일 순 없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나 사람인 것이다.
혹시 태양은 죽음을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닐까. 땅에서 태어난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 죽이는 빛. 엄마의 장례식날 뫼르소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었던 건 죽음을 쏘아대는 태양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엄마의 약혼자가 부서진 꼭두각시처럼 기절했던 것도, 엄마의 관 위에 떨어진 핏빛 흙도, 그 속에 섞여 있던 나무뿌리의 허연 속살도, 태양이 저지른 죽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그 말이 옳았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천천히 가도 빨리 가도 태양을 피할 순 없다. 어떻게 살아도 죽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미 도착한 죽음일지라도 장례의 허락이 있어야 인간 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 장례 전까지는 죽은 자도 살아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장례식을 치러야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장례가 죽음에 공식적인 모양새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는 악수하고, 서류를 뒤적이고, 변명거리를 찾고, 검은 옷을 입으면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상을 알고 있다. 장례로 죽음을 막을 순 없다. 장례식을 하든 말든 태양은 내리쬐고, 아스팔트는 녹고, 사람들은 쓰러진다. 태양은 우리 삶에 무관심한 이 세계의 얼굴이다.
무관심한 이 세계의 얼굴. 나도 이 태양을 본 적이 있다. 그날 태양은 이 세상에 고통과 비극 따윈 없다는 듯 눈부셨다. 하지만 나에게 그 얼굴은 참혹한 전쟁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아프로디테처럼 보였다. 생각만 해도 물찬 숨이 헐떡거린다. 실상 다른 사람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너무나 평범한 오후였다.
여보, 여보, 큰일 났어. 수빈이가 떠내려갔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김녕 해수욕장은 제주도 친구가 추천한 매우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아내는 기절 직전이었다. 아내의 다급한 절규도 주변에 고요한 아름다움을 깨지 못했다. 방금까지 첫째는 튜브 위에서 파도와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단단히 삐친 둘째를 달래던 중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파도가 쳤고 순식간에 수빈이를 먼바다 쪽으로 밀어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이는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구청 문화체육관에서 배운 수영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거리였다.
아이를 저렇게 혼자 둬선 안 된다. 이 생각이 나를 바다로 뛰어들게 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몸이 굳어 호흡 자세가 거칠었다. 나는 바닷물을 거푸 들여 마셨다. 그래도 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단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아이가 탄 노란 튜브에 손이 닿았다. 아이는 사태를 잘 모르는 듯 차분했다. 나는 튜브에 매달려 거친 숨을 고르며 잠시 쉬었다. 주변 풍경은 여전히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노란 튜브를 앞세워 해변 쪽으로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조금만 버텨, 조금만 더.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해안 구조대였다. 왜 여기까지 왔어요? 살짝 화가 났지만, 급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서 아이부터 구해주세요. 그러게, 나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백사장에 도착했다. 나는 시체처럼 뻗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뭉게구름이 태양을 삼켰다 토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가 사라졌고, 이에 맞춰 바다 위에는 금가루가 뿌려졌다 흩어졌다. 극적인 아름다움이 우리 가족을 고요히 둘러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만약 내 아이가 죽었더라도 하늘과 바다는 지금처럼 아름답겠지. 내가 죽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아름다움. 잔인하게 완벽한 무관심. 부서지는 파도가 하얀 무덤처럼 보였다. 뫼르소의 검은 태양이 나의 하얀 파도 위에서 번쩍거린다.
소설의 2부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이다. 뫼르소에 대한 이 세계의 무관심은 재판에서도 계속된다. 변호사는 재판에 불리할 것 같은 뫼르소의 말을 가로막고 매우 흥분한다. 뫼르소가,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가족이 죽기를 바란다고 말하자, 변호사는 어이없다는 듯 쏘아본다. 그는 재판정에서는 그런 말을 절대로 해선 안 된다며 단단히 주의를 준다. 결국 그는 화를 내면서 나가 버린다.
예심 판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뫼르소에게 사건에 대해 묻지 않는다. 뫼르소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자기 종교와 신념을 강요하는 데 심문 시간을 다 쓴다. 그는 십자가를 뫼르소 얼굴 앞에 들이대고 신 앞에 회개하라고 다그친다. 뫼르소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예비판사는 소리를 지른다.
“당신은 내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라는 겁니까?”
이게 지금 할 소린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예심 판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신께서 뫼르소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자신이 간절히 빌고 있다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높여 말한다. 뫼르소는 이제 이런 말에 진절머리가 난다. 지금 예심 판사가 해야 할 일은, 범죄를 저지른 뫼르소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는다. 그는 자기 말만 한다. 그는 뫼르소에게 무관심하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다. 예심 판사는 이 사건을 이미 자기 나름대로 매듭지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정식 재판에서도 뫼르소에 대한 무관심은 계속되었다. 판사는 엄마 이야기를 또 꺼냈다. 마치 엄마에 대한 뫼르소의 감정과 태도가 살인보다 더 큰 죄라는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건 뫼르소가 도덕적 기형아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도덕적 기형아! 이것이야말로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행동을 딱 부러지게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엄마를 양로원에 보냈는가, 왜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 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왜 엄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셨는가, 왜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해수욕을 즐겼는가, 왜 모친상 중에 여자 친구와 코미디 영화를 보았는가. 왜, 왜, 왜 그랬는가.
이 모든 이상 행동은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뫼르소가 사이코패스라는 사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찔러주었다. 그가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였냐는 가장 큰 의문점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검사의 말대로, 뫼르소는 범죄자의 마음으로 엄마를 매장했기에 살인 전에 이미 유죄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반응조차 없는 반윤리적 괴물이 확실하다. 뫼르소의 삶을 지켜봐 온 이웃들이, 이 사건은 단지 우발적인 불행이었을 뿐이라고 계속 증언해도, 재판정의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뫼르소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재판하는 건 너무나 큰 실수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나를 나로서 재판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다. 이들은 나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는 기계처럼 빈틈없이 작동하고 있다. 이들에게 나는 이방인일 뿐이다.
결국 뫼르소에게 사형이 내려진다. 내가 볼 때 이 사건은 우발적 살인이 분명하다. 따라서 뫼르소는 상고해야 한다. 상급법원이 뫼르소의 살인을 우발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면, 사형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상고를 포기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상고로 연장할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죽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삶은 여전히 부조리하단 점이다. 그렇다면 상고가 받아들여져 이십 년을 더 사는 건 오히려 끔찍한 일이 아닌가! 뫼르소는 자기 죽음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
대신 뫼르소는 자기 죽음을 그냥 받아들인다. 사형수 감방은 천장에 쇠창살창이 나 있다. 여기에 갇힌 사람은 그곳으로 하늘만 볼 수 있다. 마치 뚜껑을 덮기 전 관처럼 이곳은 죽음과 맞닿은 공간이다. 뫼르스는 이곳에 매장되어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세계를 본다. 확실한 건 오직 나의 죽음뿐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여전히 내게 무관심하다. 거대한 무의미의 세계에서 내리는 인간의 가소로운 선택에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뫼르소는 선택한다. 그는 지난 자기 삶을 확신하고 긍정한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삶에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특권인 것처럼.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고,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 나는 이건 했고 저건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어. 그러니 어떻다는 거야?
뫼르소는 종교적 구원을 거부한다. 신에 의한 구원은 현실을 감출 뿐이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자신이, 머나먼 하늘로 자기 삶을 유배 보낸 신부보다, 삶 자체를 더 깊이 확신하는 사람이다. 신부는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다.
실상 이 세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의미한 세상에 태어나 무의미하게 고통받다가 무의미하게 죽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가! 사형수 뫼르소는 이 세계의 무의미와 죽음의 필연성을 인정한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자신이 살아온 삶 그 자체를 어떤 목적이나 의미와 상관없이 긍정한다.
그는 사형을 앞둔 지금도 자기가 살아오면서 했던 선택과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삶에 대해 변명하거나 꾸미지 않는다. 그는 이 부조리한 삶을 오직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지해 살아냈다. 여기엔 어떤 설명이나 해석도 필요치 않다. 그의 삶은 남들이 보기에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일지 몰라도, 뫼르소 자신에게는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옳은 것이었다. 모든 선택의 순간순간이 그에겐 유일하고 절대적인 자기 삶이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신부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노처럼 쏟아낸 뫼르소는 그의 삶과 세계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계와 인간은 모두,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세계는 나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우발적인 사건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우연 속에서 언젠가 죽는 존재로 잠시 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뫼르소는 자신이 왜 그토록 세계에 무관심했는지 알게 된다. 세상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나 역시 세계에 무관심한 것이 정당하다. 세계와 나는 우연과 무의미가 낳은 형제인 것이다. 우연과 무의미를 거짓 없이 솔직하게 인정한 뫼르소는 세계의 이방인에서 형제로 바뀐다.
뫼르소는 사형이라는 비극 앞에서 삶의 부조리와 친해졌다. 그것은 삶의 매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했던 자신에게 정당성을 주었다. 무관심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이기에 그 어떤 것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삶에는 허락받아야 할 그 무엇도 없다. 삶은 자유다. 모든 걸 허락하는 세계의 무관심은 냉정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정겹다.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 무관심을 통해 이방인은 세계를 이해한다. 그로 인해 뫼르소는 절망이 아닌 궁극의 자유와 해방을 느낀다. 그는 전에도 행복했고, 죽음 직전인 지금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