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가 2

플라톤, 『파이돈』

by life barista

당겼으면 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주어진 궁극의 자유와 해방. 이렇게 쓰고 난 후, 난 요양원에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혼자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과연 자유로웠을까? 요양원 의사는 몰핀을 늘려도 될지 하루가 멀다고 나에게 물었다. 엄마의 비명 때문에 의사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건 당신이 전문가니까 알아서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흥분해 따졌다. 지금도 몰핀의 양이 많은 편이다, 여기서 더 늘리면 쇼크로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의사는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면회 때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나라에 가면 편히 죽을 수 있단다. 엄마가 너무 아파하니까 옆 침대 할머니가 알려줬다고 했다. 똥오줌도 못 가리고, 약에 취해 자다가 약 기운 떨어지면 소리 지르는 게 사는 거냐고. 당신은 치매까지 있어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버틸 수도 없지 않냐고. 세상에 올 땐 속절없이 왔지만, 갈 땐 있던 자리라도 정리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나쁜 세상 만나 고생만 했는데, 좋은 세상 만난 덕 좀 보면 안 되냐고.


엄마는 죽음을 좀 당기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짐승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짖어댔다. 엄마는 왜 엄마만 생각해? 꼭 그렇게까지 해서 아들 속을 뒤집어 놔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렇게 빨리 죽고 싶어? 엄마가 그렇게 죽으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라고?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하겠어? 지들 편하자고 에미 죽인 놈이라고 얼마나 씹어대겠냐고? 그냥 조용히 살다 가면 안 돼? 그게 그렇게 힘들어? 엄마는 엄마도 아니야!

엄마는 짐승을 조용히 바라봤다. 정확하게 뭘 보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눈이었다. 아니, 너무 많은 걸 봐서 이제 더 이상 뭔가를 담을 수 없는 꽉 찬 눈이기도 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아니, 내가 누군지나 알까. 말과 기침 사이 어디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락거렸다.

너무 아파 ..... 이제 안 아프고 싶어 ......


눈은 휑하게 초점을 잃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엄마는 정신을 잃었다.

의사! 의사! 여기, 아무도 없어요? 여기 좀 봐주세요! 우리 엄마 좀 봐주세요!


스위스


무엇이 내 입을 틀어막았을까. 나는 죽음을 당기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렇다고 엄마의 마지막 선택을 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장례를 준비하듯 조심스레 알아봤다.


내가 아는 말은 안락사뿐이었다. 그러나 안락사, 존엄사, 조력 사망에는 차이가 있었다. 안락사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으로 나뉜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다른 사람이 약물 등으로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걸 말한다.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에게 필요한 약물이나 음식을 중단해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존엄사라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 존엄사라고 하면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거부해 자연사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건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른 존엄사뿐이다.


안락사와 존엄사가 다른 사람에 의해 진행되는 것과 달리 조력 사망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환자 본인이 직접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디그니타스(Dignitas), 엑시트(Exit), 페가소스(Pegasos). 조력 사망을 지원하는 단체들의 이름이다. 모두 스위스에 있다. 스위스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조건만 갖추면 외국인도 이용할 수 있다. 엄마가 들었다는, 어떤 나라에 가면 편히 죽을 수 있다는 말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하는 걸 뜻했다.

생각할 게 많았다. 한국인이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하는 경우, 국내법상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조력 사망은 환자 본인의 의사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자기 의사를 결정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온전해야 한다. 그러나 엄마처럼 치매가 있는 경우에는 본인이 정말 죽음을 원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 디그니타스 같은 곳이 환자 의식이 명료할 때만 절차를 진행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뉴스를 찾아보니, 우리 국민 중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한 사람은 최소 10명에 이른다. 이들 단체에 이미 가입했거나 가입을 기다리는 한국인은 약 300명이고, 이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죽음 말곤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버려져 있다니 먹먹했다. 그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 놓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실 이런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만이 확실한 진리라는 뫼르소의 말은 어쩌면, 옳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알아서 잘 결정하라는 무미건조한 말만 돌아왔다. 형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비용을 어떻게 나눌지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엄마는 고통 속에서 혼자 돌아가셨다. 화염이 엄마가 누운 나무상자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만 아프고 싶다는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엄마의 바람은 너무 큰 것이었나. 죽음을 좀 당기고 싶다는 엄마의 말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뜻일까. 그 말은 삶의 마지막 고통 정도는 스스로 피하고 싶다는 인간적인 권리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 있다. 자기 선택과 죽음 사이.


죽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


『파이돈』에 등장하는 사형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단순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마치 좋은 휴양지로 여행 가는 사람처럼 죽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파이돈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 영혼, 몸, 지혜에 대한 편견과 상식을 깬다. 결론적으로 철학함의 진정한 의미를 밝힌다. 이때 오고 간 대화 내용을 플라톤이 연극 대본처럼 쓴 것이 바로 『파이돈』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환영하는 걸까? 그는 자신이 죽어서 가는 곳을 지혜롭고 선한 신들과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나아가 그곳은 철학에 자기 일생을 바친 사람에게 큰 복을 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기만을 바란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이 정도면 철학에 미친 사람 아닌가. 사실 우리나라에선 철학하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할 정도로 취업이 안 된다. 취업난으로 죽기를 바란다면 모를까, 소크라테스의 이 발언은 선을 넘었다.


하지만, 이 말은 철학의 순교자로 불리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말씀 아닌가. 오늘날의 시선으로 함부로 깎아내리면 나만 손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철학과 죽음에는 분명 묵직하고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를 영혼과 관련된 것에 매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선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가 말한 철학과 죽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영혼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죽음에 숨은 의미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그가 말한 영혼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깡통 아니면 진실


영혼이라고 하면, 나에게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의 포스터다. 남녀가 사랑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 바로 그 야한 사진. 사실 이 장면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데미 무어가 연기한 미망인뿐이다. 함께 포스터에 등장하는 패트릭 스웨이지는 죽은 남편의 영혼이다. 남편의 영혼이 아내와 함께 일상을 보내며 죽음의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는 닳고 닳은 신파극. 그렇다. 나에게 영혼은 손발 오그라지는 사랑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비현실적인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영혼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철학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혼만이 가장 순도 높은 진실을 발견한다. 영혼만이 정의, 아름다움, 착함과 그 유사품을 구별한다. 영혼만이 크기, 온전함, 힘과 같은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다. 진실 발견, 진리와 거짓의 구분, 존재 본질의 이해는,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자기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몸은 어떤 것일까? 『파이돈』에서 몸은 영혼의 반대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몸이 어떤 나쁜 짓을 할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몸은 우리가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몸은 자기 생존을 위해 온갖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 요구를 들어주느라고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 탓에 우리는 자기 삶을 검토할 시간도, 진리를 탐구할 여유도 없다.

무엇보다 최악은 어쩌다 생긴 진실의 시간조차 몸이 시시콜콜 간섭한다는 것이다. 정말 오래간만에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그 시간 마저 몸은 나를 잡생각과 혼동과 당혹감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몸은, 우리가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소크라테스에게 몸은 자신을 철학자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요컨대 몸은 소크라테스를 자기답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파이돈』에 몸이 나올 때마다, 나는 대신 돈을 넣어 읽었다. 그랬더니 술술 읽혔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답게 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몸이었다면, 나에겐 돈이었다. 은퇴 후 삶을 선택하고, 나답게 살려고 결심할 때마다 늘 나를 붙잡았던 건, 정체불명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다 좋아, 좋다고. 그럼, 이제 대답해 봐. 그래서 너는 이제 어떻게 먹고 살 건데?


자기다운 삶과 돈을 버는 삶 사이에서 난 늘 망설였다.



자기답게 산다는 건


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을 자기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 반대인 몸은 자기답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자기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 나는 『파이돈』에 숨어 있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따라가 봤다. 그는 이런 순서에 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다.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혜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영혼만이 구할 수 있다. 이런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몸이 만드는 감각을 믿지 않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몸의 감각과 욕심에서 멀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죽음이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나도 한번 해봤다. 나는 누구인가? 회사원이다. 아니, 이제 은퇴준비자다. 은퇴준비자는 어떤 사람인가?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은퇴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돈이 있으면 된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부터 사업이나 재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사업이나 재취업 준비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뭐야? 또 돈이잖아.

다시. 나는 누구인가? 위를 보니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에 따라, 회사를 기준으로 대답해 버렸다. 습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대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낯익은 질문이다. 맞다! 이 질문은 첫 번째 글쓰기 수업의 글감이었다. 나는 이미 이 질문에 대답한 바 있다. 수업 노트를 앞으로 주르륵 넘겨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찾았다!

이제 나는 지하 생활에 만족하는 말종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용감하게 떠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지하 말종인간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다. 나 말곤 마음 쓸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삶에서 용감하게 떠나고 싶어 한다. 용감하게?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떠나는 것에 대해 뭔가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는 떠나고 싶지 않은 꼬마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왜 떠나고 싶은가? 무엇이 두렵기도 하고, 내심 원치도 않는 삶으로 떠나게 만드는가? 무엇을 위해 나만을 위한 삶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왜 하필 철학


나는 대답이 궁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 자신을 인식한 것처럼 확고한 그 무엇이 나에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소크라테스에게 돌아왔다. 그는 도대체 왜 철학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와 관련해 강사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일화를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신탁이라는 점입니다. 신탁이란 신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탁은 결코 틀릴 수 없습니다. 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말한 것이니까요. 이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신탁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이런 신탁을 들었다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오만방자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동네 입구에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신이 인정한 최고의 현자가 바로 나라며 사방팔방에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이 신탁을 이용해 TV, 유튜브 등등 부지런히 나가서 돈도 벌고 유명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의심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탁이 자신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신탁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속 지혜를 찾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해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알고 계속 지혜를 찾는 것이, 그가 아테네에서 제일 지혜로운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제야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자기다운 삶의 의미를 알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지혜를 찾아 나서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역시 용감하게 떠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겨 더 이상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답게 살고 있지 않다고 불평했을 것이다. 그에게 철학은 자기다움이었다. 자기다움을 잃는 것, 그것이 죽음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나와 달랐다. 나는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돈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을 구하러 다녔다. 돈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자기답게 살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자기다움은 돈을 좇는 것인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하 생활하는 말종인간의 자리에서 훌쩍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나에겐 그렇게 용기를 낼 만한 삶의 의미가 없었다. 뫼르소처럼 나에게도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


소크라테스와 파이돈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감옥이다. 나는 이곳으로 뫼르소와 함께 들어간다. 사형수 뫼르소를 또 다른 사형수 소크라테스가 있는 감방으로 오게 하는 게 좀 미안했다. 하지만 뫼르소와 소크라테스의 죽음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공통점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선 완전히 다르다.


나는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진실에 다가선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사형수 두 사람이 감방에서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 두 사람의 대화는 흔한 잡담이 아니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대화다. 그것도 한 사람은 철학의 아버지고, 다른 한 사람은 실존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대화는 삶과 죽음, 영혼과 몸 등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하면, 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공통점. 두 사람 모두 석연치 않는 재판를 받아 사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둘은 적극적으로 다투지 않고 어떻게 보면 순순히 재판 결과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자기 삶에 진실하다.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동안 살면서 보여준 삶의 태도와 선택을 바꾸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이러한 삶의 태도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이방인이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그래서 지금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사람,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와 뫼르소는 모두 진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통점은 겉모습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두 사람의 속사정은 거의 정반대다. 두 사람 모두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된 이유가 전혀 다른 것이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이방인이 된 이유는, 그가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삶은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지혜에 대한 그의 사랑은 죽음조차 초월한다. 지혜가 그의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최고의 가치이며 의미이다.


반면, 뫼르소는 죽음을 통해 삶의 부조리를 직시한다. 그에게 진실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에게는 죽음을 뛰어넘는 그 어떤 가치와 의미도 없다. 종교는 이러한 진실을 은폐하는 거짓이다. 신의 구원을 말하는 사제에게 그가 분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살아있는 동안 내가 느낀 감각과 내가 내린 선택이다. 뫼르소는 삶의 무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를 이해한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뫼르소의 삶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사후 세계에 신과 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천국이나 지옥이 있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뫼르소처럼 사후 세계가 없다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내가 볼 때 뫼르소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약 그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는 죽음 이후에 대해선 모른다고 해야 옳다. 죽음 이후에는 과연 그 어떤 세계도 없을까? 과연 누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뫼르소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 마치 아는 것처럼 없다고 단정한 건 아닐까.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아홉 번째 문장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다. 지혜라는 가치를 향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소크라테스. 살아있는 순간에 솔직한 감정과 선택에 만족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삶을 계속 살고 싶진 않은 뫼르소.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삶의 이유에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지혜지만, 뫼르소에겐 아무것도 없다. 나에겐 삶의 이유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내가 쓴 문장들을 천천히 읽었다.


-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 삶에 선택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나답게 살자. 그것은 내 방식대로 세상과 사이좋게 어긋나는 것이다.


- 묻지 마 경쟁을 멈추고, 이제 자신에 대한 정치를 시작하자.


- 나를 돌본다는 건, 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나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 이웃의 삶을 환영하라!


- 나는 삶으로 초록빛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다.


-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을 때, 더 틀리기 쉽다. 그래도 괜찮다. 우주는 언제나 끄떡없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 덕분에 새로운 나를 만나 다시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 나의 꿈은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가? 우리의 꿈은 나를 의미 있게 만드는가?


나는 사후 세계가 있는지 모른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의 삶을 거기에 바칠 생각은 전혀 없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든, 없다고 믿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 믿음이 지금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이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 지금 나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면 좋은 일이다. 죽음 이후엔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어, 지금 나의 삶에 더 솔직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좋은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뫼르소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태도에서 나는, 나의 인생을 죽음의 관점에서 조율한다. 나의 삶은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삶 역시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은 환영받아 마땅하다. 나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환영하기 위해 지하 인간의 삶에서 떠나야 한다. 그곳에서 잘 떠나기 위해 자신을 돌보야 하고, 자신을 잘 돌보기 위해 내면화된 폭력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삶의 순간마다 계속될 것이다. 실수할 때도 있고, 때론 질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때마다 우리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얼굴이 말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나의 꿈과 우리의 꿈이 만날 것이다. 그 꿈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나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줄 것이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 꿈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맑은 정신으로 웃으면서.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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