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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시지프스

경험은 실패다

by life barista

새벽 5시. 알람이 안방에 누워 있던 검은 공기를 찢는다. 오늘따라 벅벅 여러 번. 짜증이 젊은 남자의 팔뚝처럼 내 몸을 가볍게 일으킨다. 조찬강연을 제때 준비하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조찬강연이라고? 25년 전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처음 했던, '경제 전망'에 대한 똑같은 슬라이드를 들고 다시 사람들 앞에 서는 일. 25년이 지난 오늘, 나는 그 지독한 반복을 위해 다시 일어난다.

새벽 첫 지하철은 항상 붐빈다. 25년 전에도 그랬다. 당시엔 무가지 신문이란 게 있었다. 지하철역 앞 좌판 위에 가지런한 작은 신문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폐종이를 수거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무가지 신문 쟁탈전은 첫차부터 막차까지 치열했다.


첫 칸에서 시작한 사람과 마지막 칸에서 시작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적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처음에 두 사람은 자기 몸에 두세 배쯤 되는 넝마에 주섬주섬 신문을 넣는다. 이내 경쟁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이윽고 둘은 5 호칸 정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두 사람은 자기 넝마를 잽싸게 버려둔다. 날랜 손은 진작 짐칸 위를 혀처럼 샅샅이 핥고 있다. 신문이 먼지를 토하면서 떨어진다. 추락은 누군가의 머리를 때린다. 맞은 이는 짧은 놀람과 욕을 찰나에 이어 내뱉는다. 두 사람의 눈과 손은 총잡이처럼 빠르다. 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땀 냄새가 지하철을 밀폐한다.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순간, 두 사람은 천천히 자신의 전리품을 챙긴다. 그러곤 느린 걸음으로 점점 가까워진다. 드디어 교차한다. 거대한 넝마가 서로 걸린다. 한쪽 넝마가 핑 풀린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종아리를 제대로 깐다. 악소리가 귀를 때린다. 책임 소재에 대한 한바탕 변론이 목청을 높인다. 쌍욕에 더한 쌍욕이 오고 간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폐지 수거하시는 분들은 지금 당장 하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땡땡땡. 종이 울린다. 끝이다. 두 사람은 내리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다른 칸으로 각자 떠난다. 지하철이 가볍게 흔들린다.

25년이 지난 첫 지하철에서 나는 이렇게 기록 영화를 편집한다. 그들은 가난, 병, 고독이라는 생존의 짜증에 맞서 몸으로 투쟁을 벌였다. 당시 그들의 삶은 사나운 맹수였다. 오늘 첫차에는 그날보다 승객은 더 많지만, 더 조용하다. 모두 휴대폰을 본다. 신문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15도 꺾인 고개들이 어두운 아침에 빠져 있다. 죽어가는 식물 같다.

시청역 6번 출구로 나가야 한다. 기상할 때 등장했던 짜증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놈이 설치한 바리케이트를 피해 하늘을 보니, 이번엔 잿빛 권태가 밀려온다. 저 멀리 새 몇 마리가 날고 있다. 무가지 신문이 한 일억 개쯤 있는 휴대폰엔 사진기도 있다. 한 장 찍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찍는다. 짜증과 권태가 왜 자기를 찍냐며 투덜거리면서 뒤돌아 나간다. 지루한 일상을 이기는 데에는 사진 한두 장 찍을 수 있는 여유가 25년 경험보다 탁월하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은 법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까 표시했던 카뮈의 문장이 이제야 제대로 마음에 내려앉는다. 경험은 하나의 실패다. 짜증과 권태는 그 실패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무가지 기록 영화가 보여준 생생한 생존 투쟁이 내게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내면의 적과 귀엽게 티격태격할 뿐이다. 잿빛 권태가 지배하는 세계. 사진을 찍는 찰나의 여백은 무의미를 깼을까? 나는 순간을 긍정하고 싶었던 걸까. 같은 일을 50년쯤 반복하면, 나는 나의 영원에 대해 의식할 수 있을까. 심심해도 좋으니, 그 누구도 가난하거나 외롭거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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