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글감이 막막했다. 시비걸기와 위로받기,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망설였다. 오늘은 유난히 몸이 피곤하고 힘이 없다. 누군가의 논리에 시비를 걸고 체계적인 근거를 엮는 '중노동'을 할 수가 없는 날이란 뜻이다. 이런 날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위안이 되는 문장에 기대어 눌러앉기로 한다.
하지만 위로로 향하는 길목에서, 꼭 시비 걸고 싶었던 문장 하나가 계속 눈에 밟힌다. 바로 ‘당신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게’라는 문장이다. 나는 인간은 스스로를 존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기 체면, 나아가 셀프 사기꾼에 가깝다.
인간이 스스로를 존경할 수 없는 이유를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이 정확히 짚어준다. 주인은 노예로부터 가짜가 아닌 진짜 존경을 원한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존경이란 자유롭고 대등한 주체 사이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어떤 노예도 자유롭지 못하며, 자유롭다면 이미 노예가 아니다.
여기서 주인은 딜레마에 빠진다. 노예를 풀어주자니 나를 더 미워할까 두렵고, 노예로 남겨두자니 가짜 존중에는 신물이 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진정한 존경을 구걸하는 주인은 심리적으로 이미 노예가 되어버린다.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존경을 원하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그의 노예가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진정한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달콤한 자기 위안까진 오케이지만, 진짜 존경은 무리다. 진정한 존경은 오직 타인들이 진정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들에게 전적으로 존경 여부를 맡길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매가리 없는 아침이었는데, 따지다 보니 열이 뻗친다. 이러다 쓰러진다. 어서 마음을 누일 만한 쉴 만한 물가로 가야 한다.
쉴 만한 물가는 뜻밖에도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 박사의 말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표를 찾는 데 최소 10년, 그리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데 다시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했다. 사실 이 문장은 숱하게 들어온 흔한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이 오래된 문장에서 강렬한 위로를 얻었다.
왜 이 오래된 문장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그건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실망과 괴로움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써서 탈고한 원고가 어제 또 퇴짜를 맞았다. 내 마음엔 쏙 드는데, '눈 밝은 편집자'의 마음에 들지 않아 판에 박힌 거절의 변만 듣고 있다.
사이먼 박사님의 말씀에 따라 나의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내가 스스로 글을 쓰며 살아야겠노라고 결심한 시점부터 책을 읽고 쓴 시간이 10년 이상이다. 오, 첫 10년의 원칙은 맞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매일 글을 쓰고 두 권의 책을 낸 시간은 겨우 5년쯤 되었다. 지난 5년간 공저와 공역을 포함해 다섯 권의 책에 내 이름을 올렸으니, 사실 엄청난 천운이 따랐던 셈이다.
지금 내가 겪는 실망과 괴로움은 천운을 천부적 재능으로 착각한 탓이었다.
사이먼 박사님의 말이 위로가 되었던 건, 나를 제대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자신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옷을 입혀야겠다는 자기 위안이 가능했다. 자기 처벌을 그만두는 가장 좋은 처방전은 정확한 자기 발견이다. 밝은 눈은 편집자가 아니라, 나에게 더 필요했다.
내게 5년 정도의 시간이 더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웃을 수 있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10년이라는데, 나는 아직 절반밖에 오지 않았으니까. 맞다. 그래서 이렇게 피곤하고 절망스러운 아침에도 쓴다. 10+10 원칙을 잔뜩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