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친구랑 톡을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야?”
MBTI 얘기할 때는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서, 이 질문 앞에서는 손가락이 멈추더군요. ENFP, ISTJ, T냐 F냐 같은 건 술술 나오는데, 정작 “나”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면 머리가 하얘집니다. 혹시 당신도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본 적 있으신가요. 남이 붙여 준 유형 말고, 진짜 나를 말해 보라고 할 때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경험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 대해 뭘 숨기고 있을까. 문장의 주어 자리에 ‘나’를 올려도, 그게 진짜 나인지 잘 모르겠고, 때로는 남의 평가와 시선을 잔뜩 짊어진, 목적어 자리의 나가 더 진짜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따지고 들다 보면, 이 모든 고민이 그냥 자의식 과몰입일 뿐인 것 같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넘기기엔, 이 질문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글쓰기 첫 번째 수업. 강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글감으로 제시했습니다. 질문을 곱씹다 보니 예전에 본 설치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양쪽에 거울이 마주 보고 있고, 관람객이 그 사이에 서면 반사된 모습이 끝없이 이어지는 작품이었어요. 저도 호기심에 그 사이에 서 봤습니다. 거울 속에는 수많은 내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중에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 많은 반사체 중에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이게 나야”라고 우기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얼굴을 직접 보는 대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혼란이 올 때, 글을 써 보라고 권유받습니다. “자기 자신을 써 보면 정리가 된다”, “일기를 쓰듯 써 보라”는 말을 많이 듣죠. 그런데 막상 나에 대해 쓰려고 앉으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됩니다. 남에게 제출하는 반성문은 오히려 쉽습니다. 반성문은 나보다 힘센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이라, 그 사람이 듣고 싶어할 말만 쓰면 되니까요.
반대로, 나에 대해 쓰는 글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검열에 시달립니다. “이 정도로 솔직해도 될까?”, “이건 너무 찌질한데?” 같은 생각이 동시에 올라옵니다. 통과 못 하면 자괴감이 밀려오고, 간신히 통과해도 찜찜한 이상한 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 글쓰기를 시도하다가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짚고 가야 할 건 하나 더 있습니다. 자기 글쓰기라는 게, 과거를 CCTV처럼 찍어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 이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인간인 이상, 모든 기억은 자기 해석의 편집이니까요.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썼다는 말은, 솔직히 말하면 ‘남들이 보기 괜찮을 정도로 나를 편집했다’에 더 가깝습니다. 겉보기엔 꽃 같지만 아무 향도 나지 않는 글, 실상 죽은 글이죠.
그렇다면, ‘나에 대해 쓴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일일까요. 이 질문을 붙잡고 있을 때, 강사는 처음 읽을 책도 알려주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제목 그대로 ‘지하’에 숨어 사는 한 남자의 기록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하급 관리직으로 살다가, 결국 세상과 단절한 채 지하 방에 틀어박혀 20년 넘게 살아갑니다. 가족도 거의 없고, 친구도 없고, 생활 자체도 초라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의 마음이 완전히 지하로 내려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향한 독설과 변명을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솔직히 짜증이 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쓸모없는 파리 같은 인간이다” 같은 말들을 스스로에게 쏟아붓는 모습은 상당히 극단적이니까요. 읽다 보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꼬여 있을까”, “그냥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안 되나?” 같은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그 짜증과 불편함이 살짝 방향을 틉니다. 그의 독백 사이사이에, 나의 일상과 묘하게 겹치는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예를 들어, 그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한 일을 머릿속에서 수십 번 복습합니다. 길에서 자신을 밀치고 지나간 군인에게 복수하겠다고 상상하다가 치밀한 계획 끝에 결국 실행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는 그를 구원하진 못합니다. 잠깐의 쾌감 뒤에 남는 건 더 깊어진 허무감뿐이죠. 이 장면에서 막상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다양한 가상의 복수로 밤을 지새운 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소설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장면은, 지하 인간과 술집 접대부 리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지하 인간은 리자 앞에서 인생의 허무와 도덕을 설교합니다. 마치 자기가 인생의 진실을 다 아는 사람인 양 말이죠. 리자는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왠지, 꼭 책을 따라 하는 사람 같아요.”
저는 이 대사가 나에게 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지하 인간은 자기 삶을 온몸으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남이 쓴 문장, 누군가의 이론, 멋있어 보이는 말을 꿰매어 자기 인생처럼 떠벌립니다. 책에서 읽은 말과 진짜 자기 삶이 삐걱대는 사람.
나 역시 그런 모습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친구가 힘든 일을 털어놓을 때, 그 사람의 감정보다 내 지식을 먼저 꺼내게 되는 순간들. “이건 애착 이론 문제야”, “이건 번 아웃이니 해결책은 이거야”라고 말해 버리는 편이, 조용히 곁에 있는 것보다 더 쉬울 때가 있죠. 문제는, 그렇게 책을 따라 살다 보니 정작 내 마음의 키는 항상 그대로였다는 점입니다. 설명 잘하는 내가 정작 자기 삶에는 영 서툴고 아팠습니다.
지하 인간은 결국 이렇게 진단합니다. 자신이 아픈 이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19세기 근대 인간을 ‘과잉 자의식’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파헤치고 해명하지만, 그 과정은 치유나 변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관계를 삼켜 버리고, 결국 자기 삶마저 집어삼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깊이 만나지 못한 채, ‘지하’로 내려가 버리는 거죠. 여기서 지하는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1인칭 인간의 어두운 내면입니다.
이쯤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쉽게 얼어붙는 걸까요. 지하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실마리가 보입니다.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꼭 나를 더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나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멀리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하 인간과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출발선이 거창한 정신 분석이 아니라, 아주 짧은 자기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붙여 준 설명이 아니라, 내가 직접 고른 단어들로 시작되는 문장. 이 수업을 들으면서, 저도 제 안의 지하 인간을 떠올리며 이런 문장을 적어 봤습니다.
“나는, 안전한 방 안에 숨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한 발짝만이라도 나가 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조금 촌스럽고, 부끄러워도 괜찮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남이 정해 준 유형이 아니라, 여기서 지금 내가 직접 쓴 내 문장으로 나를 불러 보는 것 아닐까요. 이 장을 읽고 난 뒤, 당신께도 조용히 제안하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에, 이렇게 한 줄을 적어 보시면 어떨까요.
“나는 __________________ 사람이다.”
MBTI 네 글자로는 도저히 다 담기지 않는, ‘지하’로만 내려가려고 하는 나를 잠깐 불러올리는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어쩌면 그 문장이, 생각만 많은 나와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은 나 사이에서,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힌트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