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내 앞길을 막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만사가 뒤엉키는 날. 그때 나는 남 탓의 끝판왕이 되어버립니다.
“부모님이 그때 나를 좀 더 밀어줬더라면”,
“이놈의 회사는 내가 망하길 바라는 게 틀림없어”,
“한국이 아니라 유럽 어디쯤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물론 내 입장에선 할 수 있는 말이죠. 문제는 그렇게 퍼부었는데도 여전히 삶은 그대로라는 겁니다. 세상을 늘씬 두들겨 팬 통쾌함에 살짝 기분이 풀렸다가 출근 생각에 다시 죽상이 되곤 합니다. 익명 게시판에 욕 한번 시원하게 갈기고 휴대폰을 껐을 때 느껴지는 그 찝찝한 개운함이라니! 차라리 욕이나 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벌써 나를 비웃습니다.
이런 기분이라면 수업료를 환불받고 싶습니다. 애초에 내가 이런 글쓰기 수업을 듣겠다고 나선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인생 참 묘하죠. 이번 달 읽을 책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겁니다.
“신은 죽었다.”
강사는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이번에 신을 죽일 차례가 바로 나라는 겁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이 유명한 선언을 지금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제 남 탓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겁니다. 요컨대 강사의 말은 나더러 남 탓 그만하고 이제 그 자리에서 나오라는 거였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부모님, 학교, 회사, 국가, 심지어 시대와 운세, 신에게까지 내 인생의 책임을 떠넘겨 왔습니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건 다 너희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핑곗거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었죠. 그런데 니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제 정답을 알려 줄 절대적인 존재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텅 빈 ‘주인’ 자리에 이제 누굴 앉힐 거냐?
그 자리에 타인의 시선이나 돈, 혹은 1장에서 봤던 형편없는 ‘지하 인간’을 앉혀 둘 순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겠어?” 이 소리에 발목 잡히면, 나는 내 삶의 구경꾼 내지는 악플러로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니체는 이 책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대비시킵니다. 이름부터 좀 험악한 ‘말종 인간’과, 자주 오해받는 ‘초인(위버멘쉬)’입니다.
말종 인간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그는 “나는 행복을 찾았고 이제 이 정도면 됐다. 더 힘든 건 하기 싫어”라고 말하며 따뜻한 자기 방에 큰대자로 누워 있는 사람입니다. 회사에 불만은 많지만 이직 준비는 귀찮고, 새로운 공부는 더 귀찮습니다. ‘원래 다 이렇게 사는 거지’, ‘한국 사회 참 문제야’를 베개 삼아 잠들어 버립니다. 변화와 불편, 질문을 최대한 피하려는 인간. MBTI식으로 말하면 극단적인 안정 유지형입니다.
반면 초인은 ‘불안과 설렘의 혼합형’입니다. 그는 남이 짜놓은 인생 설계도에서 과감하게 뛰쳐나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영웅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어제의 나를 조금씩 넘어서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는 인간을 ‘다리’에 비유합니다. 다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기 위한 구조물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요. 좋은 삶이란, 완성된 상태에 영원히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계속 극복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사실 나는 오해했습니다. 초인을 인생 목표로 삼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건 오해더군요. 책을 보니 니체는 반드시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며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남이 정해 준 초인의 이미지를 따라 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 인생 시즌 2를 시작해 볼 마음이 있긴 있는 거냐?”
부모님이, 친구가, 알고리즘이 정해 준 삶이 아니라, 내가 정말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나? 그래서 그쪽으로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디뎌 보고 싶은지, 그 의지 자체에, 스스로 물어보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조금 무서워도 다리를 건너보려는 ‘넘어서려는 나’. 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남 탓이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이런 노래가 들렸습니다.
“그냥 네 갈 길 가”
첫 번째 수업 때 적었던 문장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나는, 안전한 방 안에 숨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여기서 한 발짝만이라도 나가 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이 문장을 놓고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두 마음 모두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숨는 나는 나쁜 놈, 넘어서려는 나는 착한 놈, 이렇게 판단할 필요가 없어지더군요.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내가 했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까요. 그럼 이렇게 묻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이번 선택은 숨는 내가 더 좋아할까, 넘어서려는 내가 더 좋아할까?”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시즌 2를 한 줄로 적어 보세요.
거창할 필요도, 근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시즌 2는 __________________ 이다.”
잊지 마세요. 그 어떤 선택을 해도 당신의 삶은 여전히 당신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