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조용한 거절
작년 말, 개인 면담하면서 팀장이 묻더군요.
“요즘 일은 어때요? 힘든 건 없고요?”
입 안까지 올라온 말은 많았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실은 계속 야근이라 번아웃 증후군이 보여요.’
‘회의 때마다 제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슬쩍 올라가는 것 같고요.’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거 하나였습니다.
“괜찮아요. 그럭저럭 잘 지내요.”
집에 오는 길에야 온갖 말이 쏟아졌습니다. 억울함, 서운함, 지침, 초조함.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었고, 면담은 끝났습니다. ‘아까 왜 아무 말도 못 했지?’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막상 누가 ‘그래서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어?’라고 물으면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좋다, 나쁘다 말고는 내 감정을 표현할 말이 거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그렇게 내 감정을 표현 한번 못하고 11개월의 근로계약은 끝났습니다. 오늘은 글쓰기 수업 두 번째 시간입니다. 책을 두 권이나 읽고, 1장 분량의 글까지 끙끙대며 썼더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다 감당하나 막막했는데, 일단 할 일이 생긴 셈입니다.
‘수업만 따라가도 9개월은 버티겠네. 그 사이에 정말 나답게 사는 법도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몽실몽실한 상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강사가 인사를 마치고 말했습니다.
“보내주신 글들 잘 읽었습니다. 공통 피드백 하나만 드릴게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일어나는 감정을 꼭 체크해 보세요.”
‘감정을 체크하라? 어떻게?’
면담 때 제가 딱 떠올랐습니다. 또다시 입을 다물고 넘어가려다가, 2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신은 죽었다, 남 탓하는 시대는 끝났다.’ 남의 눈치라는 잡신도 내다 버려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감정 체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건가요?”
강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여서 종이에 적어 보는 거예요. 될 수 있으면 ‘좋다, 나쁘다’ 같은 말은 빼고요. 좀 더 꼼꼼하게. 예를 들어 ‘나쁘다’ 대신 ‘넌더리가 난다, 떨떠름하다, 꼴불견이다, 깔아뭉개고 싶다’ 이런 식으로요. 저는 욕지거리를 막 써 내려가는 방식도 좋아해요. 그러고 나면 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이거든요.”
다들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꽤 좋은 방법 같았습니다. 욕만큼 내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으니까요. 강사는 말을 이었습니다.
“욕을 실컷 쓰고, 그 위에 빨간 볼펜으로 감정 이름을 붙여 보세요. 분노, 경멸, 우울, 혐오, 수치심, 열등감, 외로움 같은 것들요. 그러면 내 감정을 눈으로 읽고 다시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함께 읽은 소설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였습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살짝 긴장했습니다. 예전에 읽다 포기했던 고래만큼 두꺼운 책, 『모비 딕』이 떠올랐거든요. 다행히 『필경사 바틀비』는 단편이었습니다. 번역본으로 70페이지 정도. 두께만으로도 일단 마음에 훌륭한 책이었습니다.
소설 속 ‘필경사’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손으로 문서를 똑같이 베껴 쓰는 직업입니다. 남의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베끼는 일. 자기 말은 완전히 지우고, 자기 정신은 철저히 감추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한 도구’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죠.
이야기의 화자는 뉴욕의 한 변호사입니다. 그는 바틀비라는 필경사를 새로 고용합니다. 바틀비는 말이 거의 없고, 창백하고, 기계처럼 묵묵히 필사만 합니다. 필경사로서는 완벽한 인재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느 날, 변호사가 그에게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해 달라고 부탁하자, 바틀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틀비는 그 뒤로도 변호사가 뭔가를 시킬 때마다, 같은 말만 반복합니다. 서류 대조도, 심부름도, 나중에는 본업인 필사까지도 조용하게 거부합니다. 변호사가 “왜?”라고 물었을 때도, 그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강사가 시킨 대로 감정을 체크해 봤습니다. 우울, 허무, 짜증, 연민, 불편함, 약간의 공포까지. 특히 바틀비가 계속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제 안에서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이 사람 미쳤군.”
“도대체 왜 이래?”
“저런 인간은 당장 잘라야지.”
놀라운 건, 내 감정이 변호사와 거의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엔 효율적인 직원이라며 만족했다가, 점점 당혹감과 분노, 연민과 죄책감을 왔다 갔다 하는 변호사의 마음. 저는 변호사를 이해했고, 어느새 그와 한편이 되어 바틀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지금 바틀비가 아니라, 변호사에게 마음을 주고 있구나.”
정작 주인공인 바틀비에 대해선 끝까지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일도, 외출도, 식사조차. 변호사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갖다 댑니다.
‘어디가 아플 거야’, ‘보수가 적어서 그런가?’, ‘내가 돌봐야 할 불쌍한 사람이야.’
그는 감옥에 갇힌 바틀비를 찾아가 애써 돌봅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
저는 이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바틀비에게는 너무나 명백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그 ‘당연한 이유’가 변호사에게도, 저에게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작가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처럼 사는 당신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가 왜 ‘하지 않는 편’을 택했는지, 눈앞에 보여줘도 못 볼 겁니다.’
2장에서 나는 니체를 따라 “신은 죽었다, 남 탓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결국 남도 신도 아닌 나의 선택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할 것인가?”
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이미 세상이 넘치도록 추천해 줍니다. 하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일, “이건 내 삶에서 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오직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걸 계속하는 건 나를 조금씩 아프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회사 면담에서 “괜찮아요”라고 말했던 나를 떠올리면, 바틀비의 이 말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바틀비의 이 말이 단순한 짜증이나 싫증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은 남의 말만 평생 베껴 써야 했던 필경사가, 생애 처음으로 제 삶을 향해 던진 지지 선언 아니었을까요. 타인의 기대와 속도가 무단 침입한 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언해야 합니다. 모두 나가 달라고, 이런 식의 삶은 거부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남이 정해 준 안전한 궤도를 이탈하겠다는, 어쩌면 목숨을 건 독립 선언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바틀비를 다시 불렀습니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거부했던 기억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내가 선택한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가 있나요? 머릿속으로만 욕하지 말고, 노트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나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한 줄이, 남이 써 준 시나리오에서 빠져나오는 단단한 실마리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