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인생에서 나답게 살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by life barista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감정을 체크한 결과, 나는 꽤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내 의지로 고른 건 하나도 없는데 결과까지 안 좋으니까 억울함은 당연한 감정이겠지요. 정신 차려 보니 인생이란 게임은 이미 꽤 진행되었더군요. 전공은 시험 점수로 결정되었고, 직장도 친구 따라 엉겁결에 시작한 알바 때문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주인집이 이민 가는 바람에 엉겁결에 사게 되었습니다. 집값은 그때부터 꾸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겉보기엔 우등생, 일류대, 대기업, 투자 잘하는 친구도 “나, 이게 원래 원하던 삶은 아니야”라고 털어놓습니다. 자기 계획대로 사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조금 편해지기도 했습니다.

억울한 건 이겁니다. 부모님, 선생님들은 인생이 대충 어떤 맛인지 이미 아셨을 텐데, 왜 그렇게 지겹게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 자신’이라는 둥,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둥, ‘그 꿈을 이룰 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말을 반복했을까요. 차라리 이렇게 말해줬으면 어땠을까요. 태어났다는 건 그냥 벌어진 일이라고. 이제 남은 건 끊임없이 죽어가는 과정뿐이라고. 너무 아등바등해도 결국 다 거기서 거기라고.

나보고 내 삶의 주인공 이래서 한참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캐스팅된 줄도 모르는 주인공도 있나 봅니다. 저는 왜 이 세상에 불려 나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맡은 배역이라도 화려하고 세련되면 좋겠는데, 하는 짓은 늘 행인 3이나 잘 안 보이는 시체 5입니다. 그마저도 못하는지, 머릿속 감독들은 계속 소리칩니다.

“컷!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가라고! 왜 그렇게 주인공을 째려보면서 가는 거야!”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젠장, 누가 밀었어!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풀이 죽은 채 네 번째 글쓰기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이번 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랍니다. 책 두께와 독일어로 된 책 제목이 ‘너, 정말 읽을 생각은 아니지?’ 빈정댑니다. 강사님은 이미 우리의 썩은 표정을 읽었는지, 차분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설령 읽더라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여기서 한두 개 생각만 건지면 나머진 과감하게 버려도 성공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온라인 쇼핑몰 훑어보듯 책장을 넘겼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번역체에 한숨도 나오고, 동시에 묘하게 끌리기도 했습니다. 그중 제 눈을 잡아끈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던져져 있음(Geworfenheit)’


왠지 제 신세를 잘 설명해 줄 것처럼 생긴 단어였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그냥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떤 부모에게 태어날지, 사실 우리가 고른 건 하나도 없다는 뜻이겠죠.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 써 보았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등 떠밀려 왔다. 젠장, 누가 밀었어! 따지려고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거친 바다에 던져져 허우적거리며 둘러봐도 나를 세상에 밀어 넣은 원인이나 이유는 없는 상태. 적어도 제 기준에는 ‘던져져 있음’이라는 말이 꽤 잘 맞았습니다.


이렇게 보니, 지난번 읽었던 『필경사 바틀비』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바틀비도 1900년대 초 뉴욕에 필경사로 던져진 불쌍한 사람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가 반복했던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은, 던져진 주인공에게 딱 맞는 대사 같았습니다.



뒤끝 작렬 인생길


이 책에서 두 번째로 끌린 말은 ‘현존재(Dasein)’입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색다르게 부르는 말입니다. 사람이란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 이미 와 있음을 두고두고 문제 삼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별일 없이 살다가도 문득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지?” 이렇게 질문하는 게 인간의 특징이란 거죠. 이 말도 나를 잘 설명해 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네요. 어제 제가 그랬으니까요.


이쯤 되니 이 책이 나에 대해 뭔가 말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그래서 “좋아, 하나만 더 뽑아 보자”는 마음으로 철학적 로또를 한 번 더 긁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만난 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

악. 방금 돋아난 희망의 새싹이, 군홧발에 밟히듯 꺾여 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나 싶었는데, 조금 더 읽어보니 하이데거가 이 말을 꺼낸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가 진짜로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이런 거였습니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죽지 않을 것처럼 사냐?


맞는 말이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괜찮아’, ‘원래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별거 있나’이런 말들이 주는 안심 속에서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빈둥거렸습니다. 인스타 핫플, 고급 자동차, 명품 가방을 흠모하면서 시간을 태우며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똑같은 기준을 들이대며 제 삶을 밤톨처럼 깎아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런 삶이 내가 선택한, 내가 살고 싶은, 꿈결 같은 나만의 삶이라고 굳게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쨌든 내 삶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이 철저히 나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나 대신 죽어 줄 수 없죠. 제 생각은 이렇게 옮겨갔습니다. 죽음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죽음’이라면, 반대로 지금 이 삶도 그 누구도 대신 살 수 없는 ‘나만의 삶’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는 그냥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어쨌든 ‘나로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울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생이란 결국, 그 선택의 가능성을 하나씩 확인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닐까요.


하이데거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왜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이 그렇게 불쾌하고, 가끔은 무례하게 느껴졌는지. 그 질문이 내가 쌓아 올린 일상의 안전한 바닥을 한꺼번에 흔들어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혹시, 지금까지 잘못 살고 있었던 거 아니야?” 하고 채근하듯 물어오는 방식으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등 앞에서 유턴 표지판이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마치 제게 “돌아가 볼래?”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삶의 의미는, 죽음을 떠올릴 때 비로소 반짝 켜지는 유턴 신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휴대폰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나로서 죽는다. 고로, 나는 나로서 살 수밖에 없다.”



아, 그래서 내가 그때 거기


바틀비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의 선택은 분명 비극입니다. 동시에, 삶의 순간들이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과 책임 아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아주 뾰족한 자기표현 같기도 합니다. 바틀비는 마지막까지, 펄럭이는 침묵의 깃발처럼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오늘 몇 번이나 나답게 선택했나요?”

이번 달에 제가 고른 나만의 문장은,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조용한 대답입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결국 나의 선택들이 대신 말해 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서 내 방식대로 세상을 조금씩 거절하는 일이다.”


단 한 번도 나로 살아 본 적 없는 남들이 던지는 훈수는 이제 사절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쓴 문장으로 삶을 채우고 싶네요. 당신은 어떠신가요.


“나는 __________________ 할 때 나답다고 느낀다.”


숱한 선택의 바다를 건너 삶의 마지막 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마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릴지 모릅니다.


“아, 그래서 내가 그때 거기 던져져 있었구나.”


그때까지는 이미 태어난 나로서 내가 고른 문장들로 하루하루를 조금씩 채워 가면 좋겠습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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