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글쓰기 수업 세 번째 시간, 강사가 들어오자마자 뜻밖의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 저는 학력을 조금 위조했습니다.”
강의실이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철학박사라더니 설마…?’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강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나왔거든요.”
그제야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지만, 예전에는 초등학교였지요. 강사는 웃음이 잦아들자 조용히 말을 이었습니다.
“초등학교가 기초 학문을 배우는 곳이라면,
국민학교는 말 그대로 국가에 쓸모 있는 국민을 만드는 학교였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세계관이 세운 학교입니다.”
강의실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강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국민은 늘 평가되는 존재가 됩니다. 국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어떤 등급의 사람인지 끊임없이 점수로 확인받는 존재가 되는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뜨끔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평가받는 삶에 익숙했습니다. 받아쓰기 점수, 시험 등수, 생활기록부, 회사 인사고과. 늘 어딘가에 숫자가 붙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이름 대신 등수로 불리는 삶. 그래서인지 저는 어느새 SNS 속 화려한 남의 일상과 비교하는 일에 꽤 진심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입니다. 전교 1등을 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소문난 골초였습니다. 뒤뜰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보통 큰일이 납니다. 부모님이 불려오고, 생활기록부에 기록도 남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걸리면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저렇게 착한 애가 담배를 피우겠니.”
나라 법과 학칙이 금지한 흡연도 공부 못하는 학생이 하면 탈선이고, 1등이 하면 스트레스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세상은 같은 행동도 평가가 다르다는 걸.
이번 수업에서 읽은 책은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였습니다. 책을 펼치자 놀라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불평등한 사회에 살면서도 불평등을 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도 그랬습니다. 친구 연봉이 나보다 높으면 배가 아프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간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경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시험, 입시, 취업, 승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순서를 비교당했습니다. 결과는 늘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물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더 위로 올라가지 못했을까?”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불평등했다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내용은 이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착취당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산다. 예전에는 외부 채찍, 지금은 내가 들고 있는 채찍. 이걸 우리는 ‘자기계발’이라고 부릅니다. 새벽 미라클 모닝. 출근길 영어 앱. 점심 재테크 영상. 퇴근 자격증 강의. 조금 쉬면 불안이 옵니다.
“남들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거 아닐까.”
돌아보니 저도 꽤 오래 이렇게 살았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제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에서 “누가 이런 경쟁 규칙을 만들었을까”로.
물론 세상을 당장 바꿀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 규칙 안에서 어떤 얼굴로 살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스타 스토리에 “나 오늘 등수 말고 내 이름으로 살았음”이라고 올렸습니다.
오늘 당신에게도 빈칸 하나를 건네고 싶습니다.
“나는 __________________ 사람으로 살고 싶다.”
지금 답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