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현실’이라는 말을 의심하는 법
퇴근길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날 회사에서 인사고과 결과가 나왔는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제 이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C. 딱 한 글자였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울컥했습니다. 이 알파벳 하나가 내 1년을 다 설명한다고? 회의 준비하느라 늦게까지 남아 있던 날도 있었고, 동료 부탁을 거절 못 해 대신 맡았던 일도 있었고, 회사 일이 마음에 걸려 주말에도 출근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 모든 시간이 C 안에 뭉개져 있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뜨거운 물을 붓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금방 이런 생각이 따라붙었거든요. “뭐 어쩌겠어. 원래 그런 거지.” 컵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지. 현실을 받아들여.”
순간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나는 불같던 분노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해결하고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모든 걸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모래처럼 서걱서걱 씹히는 낱말이 하나 입에 담겼습니다. 현실.
“현실? 누구 마음대로 이걸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정한 거야?”
이 질문 끝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미셸 푸코. 이번 주 강사가 추천한 책도 그의 『자기해석학의 기원』이었습니다. 푸코는 사람들이 권력에 억지로 복종할 때보다,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 권력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조금 이해되었습니다. 사람을 관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을 구분해서 서로 경쟁시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우수한지, 누가 더 부족한지, 누가 정상인지, 누가 문제인지. 이렇게 기준을 세우고 사람을 나누기 시작하면 사회는 사람들을 훨씬 쉽게 다룰 수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숫자와 등급으로 표시되는 순간 비교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좀 더 잘해야지, 누구보단 앞서가야지, 다음엔 1등 해야지.
더 흥미로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누군가가 강제로 통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공부하고, 평가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더 오래 일하고, 등급에서 탈락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합니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굳이 사람들을 직접 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그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푸코가 자주 써먹는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유럽의 어떤 의사가 정신병을 치료한다면서 환자들에게 찬물을 계속 퍼부었습니다. 그는 환자에게 이렇게 외치도록 강요했습니다. “나는 미쳤습니다!” 환자는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그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겠죠.
이런 행동은 지금 보면 분명 고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의사에게 이것은 환자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치료였습니다. 그 시대의 의학 지식이 그 행동을 정상적인 치료라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누가 정신병자인지, 누가 정상인지 결정하는 것도 사실은 권력과 지식이 결탁해 만든 것이라는 점입니다. 권력은 의학지식과 같은 전문적 판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정신병원을 만들고 부랑자를 수용소에 가두고 사회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격리합니다. 그 모든 일이“정상 사회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평가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등급에서 탈락하지 않으려고. 어떤 기준이 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모든 기준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현실.”
강사는 현실을 한자로 크게 쓴 화면을 가리켰습니다. 현실(現實). 그러곤 단어를 가만히 하나씩 뜯어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강사는 이렇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현실이라는 한자를 풀어 보면 조금 묘한 구조가 나옵니다. 現은 왕(王)이 보는 것(見)입니다. 實은 그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숨어 있는 셈입니다. 왕의 시선이 만든 결과. 어쩌면 현실은 누군가의 관점이 세상의 기준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습니다. 우리가 “현실은 원래 그래”라고 말할 때 그 현실은 사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만든 질서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을 줄 세우고 평가하고 경쟁시키는 방식.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관리하기 쉬워지니까요.
컵라면 국물에 눈물이 떨어진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만든 기준 안에서 제 삶이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지만 푸코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 기준은 누가 만든 걸까.”
푸코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혁명을 먼저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훨씬 작은 일을 말합니다. 그는 이걸 ‘자기 자신에 대한 정치’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 기준을 남이 정해 놓은 규칙에 맡겨 두지 않는 것.
푸코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만들려고 했다고 합니다. 조각가가 돌을 깎듯 자신의 습관을 다듬고 생각을 가다듬고 삶의 모양을 조금씩 만들어 갔다고 합니다. 삶을 평가받는 성적표로 보는 대신 직접 만들어 가는 작품으로 본 것이죠.
컵라면을 다 먹을 즈음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습니다. 짧게 이렇게 적었습니다.
“묻지 마 경쟁엔 올라타지 않는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썼습니다.
“오늘은 남의 눈 말고 내 눈으로 살았다.”
내가 당장 바뀌진 않을 겁니다. 물론 세상도 그렇겠죠. 그래도 한 가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을 평가표가 아니라 내가 만드는 작품으로 보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고 현실적인 정치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도 빈칸 하나를 건네봅니다.
“나에게 현실이란 __________________ 이다.”
지금 답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문장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자기 삶을 조금씩 다듬고 감상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