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맞은 건 엉덩이인데, 지금까지 아픈 건 마음입니다

by life barista

폭력은 내 안에서 여전히 스트리밍 중


“안녕하세요! 이번 달 우리가 함께 써 볼 주제는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요즘 스스로를 잘 돌보고 계신가요?”


일곱 번째 수업의 시작. 강사의 평범한 안부 인사가 이상하게 콕 박혔습니다. 남이 힘들다고 하면 “좀 쉬어, 무리하지 마”라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말하면서, 정작 자신에겐 참 야박한 나였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말은 더 아팠습니다. 자기 돌봄은 몸 관리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통째로 돌아보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릴 적 당한 폭력만큼 자기 돌봄을 방해하는 게 없다고 강사는 덧붙였습니다. 그 말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세대나 그 이전 세대라면, 학교에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폭력을 한두 번쯤은 겪었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선생님이 휘두르는 폭력은, 아무리 포장해도 치명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만들어 가는 시기에, 매일 마주치는 가장 중요한 권위자로부터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아, 그 사람을 흉내 내고 닮아가면서 자신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그 모델이 나를 때렸습니다. 아프리카 오지 마을로 여행을 떠났는데,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를 잃어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개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교정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이 겹치기도 합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 호되게 맞고 돌아온 날, 아버지는 상처에 바셀린을 발라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선생님이 그러셨겠니.”

그 순간 나는 확신했습니다. ‘나에게 뭔가 큰 잘못이 있구나.’


지금 돌아보면 그날 저는 세 번 맞은 셈입니다. 선생님에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모든 잘못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나 자신에게.


저에겐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하면, 첫 반응이 ‘왜 저래?’가 아니라 ‘내가 뭘 잘못했지?’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따져야 할 일이 생겨도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며 자신에게 자백을 강요하곤 합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말하던 강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를 탓하는 습관은, 권위자들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어린 내가 자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생존 전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습관이 결국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나를 돌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네요.”



폭력은 인간을 타고 우리를 맴돈다


이번에 읽을 책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입니다.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부터 고기를 전혀 먹지 않습니다. 다이어트도, 환경 보호도 아닌 이유 때문입니다.


영혜는 끔찍한 꿈을 꿉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들이 가득 매달린 헛간에서, 날고기를 씹어 먹는 자신과 마주치는 꿈. 그 꿈이 고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영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또 폭력을 씁니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 파병 군인이었습니다. 베트콩 일곱을 죽여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반복해 자랑합니다. 영혜는 그런 아버지에게 열여덟 살까지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습니다. 전쟁이 남긴 폭력은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영혜에게까지 유전자처럼 전해졌습니다. 폭력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에 매복해 있다가 관계를 타고 세대를 넘어 우리 곁을 맴돕니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선택은 어쩌면 몸 안에 쌓여온 그 폭력을 더 이상 삼키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릅니다. 남들에겐 너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고기가 영혜에게는 피 냄새와 폭력의 기억을 압축한 덩어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돌봄을 “지금의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드는 프로젝트”로 상상합니다. 더 건강하고, 더 효율적이고, 더 멋진 나를 만드는 일. 하지만 그런 자기 돌봄은 자칫, 지금 여기 있는 나를 희생해 ‘업데이트된 버전의 나’를 생산하는 투자 활동이 되기 쉽습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사회는 ‘정상’이라는 기준을 세워 우리를 끊임없이 길들입니다. 영혜의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은 그저 개인의 분노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영혜의 몸에 강제로 각인시키려는 집행관의 손길에 가까웠습니다. 학교에서 모범생이라는 정답지에 맞추기 위해 매를 들었던 선생님들처럼 말이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돌보기보다, 사회가 승인한 ‘정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더 익숙해졌습니다. 폭력에 다친 마음을 돌보는 대신 괜찮은 사람으로 연기하는 데 더 바빴던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자동 번역하는 습관


『채식주의자』를 끝까지 읽다 보면, 한 장면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세 번 반복됩니다. 아버지가 고기를 거부한 영혜를 때리고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뺨에 피가 비칠 정도로 폭력이 휘둘러지자 영혜는 몸부림칩니다. 그래도 먹지 않자,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영혜를 붙잡으라고 소리칩니다. 그 틈을 뚫고 나온 영혜는 과도를 집어 들어 자기 손목을 그어버립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칩니다.


폭력은 보통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눕니다. 그런데 자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하나로 일치시킵니다. 폭력의 방향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몸을 향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런 자해를 나만의 방식으로 해 온 것은 아닐까. 혹시 당신도 이런 말을 하진 않았나요.


“그 선생님이 그러셨으면 내가 잘못한 게 틀림없어.”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우리는,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자동 번역해 이해하는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견디지 못하는 내가 문제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폭력은 그렇게 바깥에서 안쪽으로 방향을 바꿔 결국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습관”으로 굳어졌습니다.



헤어질 결심


책을 읽으며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니 이런 질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모습이 나를 돌보지 못하게 하는 ‘가짜 나’일까?”

“어떤 모습이 내가 돌봐야 할 ‘진짜 나’일까?”


영혜에게 육식은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폭력이 숨어 사는 은신처였습니다. 그가 고기를 거부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진정한 나를 기르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폭력이, 마치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덮고 있을까요.

“나는, 어릴 때부터 좀 맞아야 정신 차리는 타입이야.”

“나는, 원래 나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니까 좀 나중에 해도 돼.”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이 말들은 어느새 내 정체성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말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었던 ‘생존용 마스크’였을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돌본다는 것은, 독한 폭력 때문에 얼굴을 가려야 했던 그 마스크를 하나씩 벗어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는다는 건 안전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망설이는 이유입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입니다. 당신의 생존 마스크는 어떤 모습인가요. 그걸 벗고 싶은가요. 벗어야만 하나요.


“자기 돌봄을 막는 나의 생존 마스크는 __________________ 이다.”


영혜가 알몸으로 햇빛을 맞으며 물구나무 서 있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의 모습은 너무 연약해서 쉽게 부러질 것 같지만, 땅을 깊게 붙잡고 서서 마치 나무처럼 평화롭게 보입니다.


우리 안의 ‘진짜 나’도 언젠가 온 세상의 형제처럼 평화롭게 햇빛을 받길 바랍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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