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나였지만, 이제는 내 편이 아닌 것들

by life barista

나를 위해 반드시 밀어내야 하는 것


스마트폰이 울렸습니다. 새 메일이 들어왔네요. 강사님이 보내주기로 했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 해설이 드디어 온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변해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님의 글은 생각보다 불쾌했습니다. 글은 온통 ‘피’와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강사님은 첫 아이를 수중 분만으로 낳을 때 겪었던 경험을 꺼내놓았습니다. 양수와 피로 얼룩진 물, 축축하게 뭉개진 태반, 가위로 잘려 나간 탯줄,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고 했습니다.


강사님은 양수와 피, 태반과 탯줄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이것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기를 감싸고 안전하게 보호하던 것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이 없었다면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들은 더 이상 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져야 하는 것들’로 변합니다.


불쾌할 수도 있는 이 출산 장면은 『공포의 권력』에 등장하는 아브젝트(abject)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아이의 태어남은 ‘주체화’의 출발입니다. 엄마와 한 몸이었던 아기가 이제 서로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두 존재, 두 사람으로 갈라지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테바는 이 순간에 아주 묘한 존재들을 포착합니다. 탯줄이나 양수처럼 방금까지 분명히 ‘나의 일부’였지만,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어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밀어낸 그것들은 이후 삶에서 피와 상처, 냄새, 더러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공포와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며, 내가 어디까지가 ‘나인지’ 그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다시 그리도록 만듭니다.



더 이상 삼키지 않겠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 육식은 그런 아브젝트였습니다. 영혜는 꿈속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헛간을 봅니다. 날고기를 씹어 먹는 자기 자신과 마주합니다. 그날 이후 영혜는 고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월남전에 파병되어 훈장까지 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아버지는 그런 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입에 고기를 밀어 넣으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영혜는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런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랐습니다. 그녀에게 육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폭력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엮여 있는 증거였습니다. 어린 시절,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던 집, 그리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고기는 모두, 자기 생존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했던 폭력의 세계였습니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피와 살은 모두 소화됐는데,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크리스테바의 눈으로 본다면, 육식은 영혜에게 아브젝트였습니다. 그렇다면 영혜의 채식 선언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혐오스럽지만 한때는 나였던 것들과 결별하며 새로운 나의 경계를 세우려는 몸부림이 됩니다.



경계에서 피어나는 현기증


강사님의 글에는 인상적인 비유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바로 비무장지대(DMZ)입니다. DMZ는 어느 쪽의 것도 아니지만,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이루는 땅입니다. 실질적인 국경 지대로서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우연히 울린 총성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곳입니다


강사님에 따르면 아브젝트도 DMZ와 비슷합니다. 딱히 나의 것이라고도, 그렇다고 완전히 남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경계선이지만, 이곳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라는 질서 전체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 경계에서 극심한 불안과 혐오 그리고 현기증을 경험합니다. 영해가 정신병원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나뭇잎과 뿌리가 돋아나길 바랐던 장면들은 바로 그런 근원적인 자기 경계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영혜는 결국 나무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폭력을 견디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나무. 땅에 뿌리를 내린 채 햇빛과 비만 먹으며 서 있는 나무. 영혜에게 나무는 폭력 이전의 자기, 혹은 폭력 바깥의 순수한 자기였는지도 모릅니다.



진짜 자기 돌봄은, 나였던 것을 밀어내는 일


이렇게 보면, 자기 돌봄은 단순히 나를 예쁘게 가꾸는 일이 아닙니다. 내 안에 울타리를 치고 나만의 경계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짜 자기 돌봄에는, 한때는 나였지만 이제는 내 편이 아닌 것들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결별하는 과정도 들어 있습니다.


폭력을 너무 오래 견디다 보면 혹처럼 보기 흉한 습관들이 남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렸어.” “버텨야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라며 덮어 왔던 말들은, 실은 진짜 내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급히 둘러댄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한때 그런 합리화가 나를 버티게 해 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언젠가 내 안 어딘가에서 썩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돌본다는 건, 내 안의 상처와 불편한 기억들, 더 이상 내 편이 아닌 삶의 방식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치 여전히 나인 것처럼 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그것들을 밀어내야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지금 여기 있는 나’와 제대로 마주 앉을 수 있습니다.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문장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자책을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물음은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한때는 나였지만, 이제는 내 편이 아닌 것들이 지금 내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는가?”


『채식주의자』와 『공포의 권력』은 이 질문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 단면을 살짝 보여줍니다.


영혜에게 육식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방아쇠였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그 역할을 하게 될까요. 나의 경계를 뒤흔드는 일이니 분명 아프고 버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엄마 배 속에서 다 자란 아이가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 나와야 하듯이 말입니다.


영혜처럼, 우리도 언젠가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우리는 ‘나를 세우는 바로 그 움직임’으로 동시에 ‘더 이상 내가 아닌 것들’을 내던집니다. 한때는 나였지만 이제는 내 편이 아닌 것들을 떠나보내는 그 동작 속에서 비로소 ‘지금 여기의 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납니다.


나는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문장을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나를 돌본다는 건, 한때는 나였지만 이제는 내 편이 아닌 것들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떠나보내는 일이다.”


이제 당신이 빈칸을 채워볼 차례입니다.


“한때는 나였지만,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나보내야 할 것은 ( )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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