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투구를 쓰고 나선 까닭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을 수정해
오마이뉴스에 올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조회수가 다르네요.
(기사링크)
https://omn.kr/2h6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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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라는 이름의 유령
1장에서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갈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문 앞에 서면, 이런 질문들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준비는 잘 되었나?"
"빠트린 건 없나?"
AI가 척척 써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지 의심까지 들지요. 그러다 보면 우리는 슬며시 다시 성벽 안으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완벽한 준비'라는 이름의 유령에게 붙잡히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잘 빠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후배가 AI를 업무에 도입해 보자고 했을 때, 저는 "조금 더 검토해 보자"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신중한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제 밑천이 드러날까 봐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겁니다. 계획이 정교해질수록 몸이 더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준비는, 변화를 미루는 가장 우아한 핑계가 됩니다.
다시는 시험하지 않겠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돈키호테의 기묘한 의사결정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창고에서 낡은 갑옷을 꺼내 닦고, 부족한 얼굴 가리개는 판지를 잘라 붙여 투구를 만듭니다. 누가 봐도 부실해 보이는 그 투구를 시험해 보겠다며 칼로 한번 내리치는데, 예상대로 판지 투구는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립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아직 멀었네" 하고 다시 공사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판지를 다시 덧대고 쇠막대로 보충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시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겉으로 보면 자기기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투구의 물리적 강도를 믿은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나갈 수 있다는 자기 마음의 단단함을 스스로에게 인식시켰다고. 칼날의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해야만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는 아마 영원히 서재를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손안에 지성
레비-스트로스라는 사람은 이런 태도를 두고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불렀습니다. 완벽한 재료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손에 쥔 재료들을 엮어 상황에 맞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이미 있는 것들을 새로 조합하는 창조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기계가 보여 주는 '강철 같은 정답'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매끄럽게 완성된 답 앞에서, 인간이 만든 허술한 초안은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AI가 쏟아내는 결과물에는 나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돈키호테가 판지를 덧대어 만든 투구에는 허술하지만, 출발점을 스스로 만들려는 한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지성은 자기 의지를 실현할 때 창조성이라는 빛을 발합니다.
당신의 판지 투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AI에게 어설픈 질문을 던지고, 평생 쌓아 온 경험과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든 엮어 보려 애쓰는 모습은, 남들이 보기엔 판지 투구처럼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판지 투구가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칼날도 막아내는 투구를 만들려다 결국 출발조차 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돈키호테가 건네는 메시지는 투박하지만 분명합니다.
"내 투구의 쓸모를 칼날에만 맡기지 마라."
어느 순간, '이 정도면 한 번 나가 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강철 투구를 만들면서 성벽 안에서 계속 시험할 것인가, 아니면 어설프더라도 고친 투구를 쓰고 도전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돈키호테의 모습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선택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에 따라, 다음 장에서처럼 세계의 모습도 달라질 것입니다. AI라는 같은 풍차를 두고도, 어떤 이는 무찔러야 할 거인을 보고, 어떤 이는 든든한 맷돌을 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