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를 키운 아내는 “내가 개까지 키우랴!” 못마땅해 했다. 사실 아내는 개를 몹시 좋아한다. 정말 힘에 부쳐서 하는 말이다. 눈치하면 회사원. 나는 20년차다. 언제나 이기는 아내 편을 들었다. 아내는 큰 딸에게 엄청난 졸업 선물을 약속했다. 개를 키우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좋아서 야단법석이다. 다들 들뜬 채 유기견 입양 센터로 향했다.
온 몸으로 아양을 떠는 개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너규리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놈이었다. 사냥개처럼 용맹하게 잘 생긴 얼굴. 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 허리와 짧은 다리는 반전이었다. 진돗개와 엘시코기가 사랑을 나눈 것이 틀림없었다. 짧은 다리지만 껑충껑충 높게 뛰어 올랐다. 성격도 밝고 몸도 건강해 보였다.
그렇지만 센터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다. 강화도 외딴 집에서 발견될 당시, 너규리는 아사 직전이었단다. 후원금 용지에 인쇄된 너규리 사진은 깡말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인이 버리고 가면서 목줄을 풀어주지 않아 쓰레기도 뒤질 수 없었던 탓이다. 동네 주민들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길렀는데, 막대기로 그렇게 심하게 때렸단다. 천만다행으로 자원봉사대에 의해 발견되었고, 심장 수술과 다리골절 수술 그리고 중성화 수술을 받고 이 곳 센터까지 왔단다.
집으로 오자마자, 아이들은 이름부터 바꿨다. 이름은 ‘가족 개명 공모전’에서 뽑힌 ‘누리’로 정해졌다. 누리는 세상이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이다.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누리는 짧은 다리를 걱정했던 나를 비웃듯 번개처럼 뛰며 산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었고, 나는 이제 누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 세상을 여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누리는 서열을 헷갈렸다. 막내아들에게 으르렁 거리다가 여러 번 혼쭐이 나서야 자신이 막내라는 걸 눈치 챘다. 누리는 할아버지 트라우마가 있었다. 특히 등산 스틱을 든 할아버지를 보면 내 뒤에 숨어 아픈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누리를 안고 있으면 내 몸도 부르르 떨렸다.
누리는 다른 사람이 주는 건, 고깃덩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식구들 손을 거쳐야 먹는다. 간식을 땅에 두고 기다리라면 잔뜩 침을 흘리면서도 잘 참는다. 먹으라고 하면 그제야 쓱싹 먹어치운다. 대견하다. 신통방통해 여기저기 자랑도 많이 했다.
언제부터인지 골목에 등장한 요크셔테리어는 채 30cm가 되지 않았다. 누리는 그 놈에게 한 달을 쫓겨 다녔다. 진돗개만한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까지 탑재한 누리가 창피했다. 고 놈 주인은 덩치 큰 누리가 도망가는 게 재미있는지 계속 “물어, 물어!” 하며 장난친다. “누리야, 꽉 물어버려!” 약이 오를 때로 오른 나도 냅다 소릴 질렀다. 알아들었나? 갑자기 몸을 돌린 누리가 고 놈 코를 물어버렸다. 아주 살짝. 방금까지 신났던 고 놈 주인이 호들갑을 떨면서 돌아간다. 통쾌했다. 하긴 고 작은 놈과 싸워 이겨봐야 무슨 소득이 있겠나. 완벽하게 이긴다 해도 본전이고, 만에 하나 어디라도 물리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누리가 지혜로워 보였다.
누리는 자기보다 큰 개를 보면 멀찌감치 돌아간다. 계획했던 코스는 달라졌으나, 이렇게 하면 불편한 마음 없이 산책을 산책답게 즐길 수 있다. 길고양이를 보면 사냥 본능이 살아나는지 대추격전이 벌어진다. 추격의 막바지. 사냥감을 제압하려는 순간, 고양이도 돌변한다. 털을 세우고 등을 높이고 날카롭게 울어댄다. 지금부터 누리 타임이다. 누리는 마치 고양이가 사라진 것처럼 못 본 척 쓰윽 지나간다. 바로 코앞에 멀쩡하게 있는데도 말이다. 자기도 쑥스러운지 혀로 코를 한 번 핥는다. 이런 대사를 날리는 것 같다. “여보게 친구, 웃자고 한 장난에 죽자고 덤비지는 말게나.”
누리는 나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다. 그 누명은 ‘똥누리’라는 주홍글씨로 남았다. 배가 살살 아팠지만 아침 운동을 거를 정도는 아니었다. 늘 그렇듯 누리는 거침없이 똥을 누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리가 배변 욕구를 시원하게 해결하는 걸 보고 있자니, 대장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괄약근을 최대한 조여야만 했다. 장소를 물색하느라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급똥 마려운 사람이, 똥 덜 싼 개를 끌고 산길을 헤맸다. 급기야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안도의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 누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다가왔다. 코를 킁킁 거렸다. 달려들 기세다. 부탁이다 누리야, 제발 그러지 마! 아내가 누리를 혼내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어디서 똥을 이렇게 잔뜩 묻혀 온 거야, 똥누리!” 누리는 입이 참 무겁다. 이 사건은 아직 우리 둘 밖에 모른다.
누리는 큰 덩치와 이빨을 믿지 않는다. 자기를 강한 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를 높이면 큰 코 다친다는 처세술의 기본을 아는 듯하다. 처세술(處世術)이란 세상에 어떻게 위치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생각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 즉 삶의 좌표를 알아채고, 상대방을 살피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누리처럼 하지 못했다. 상대를 높이기보다 나를 높였다. 상대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보다, 내 할 일만 하면 되지 아니냐며 독불장군처럼 무리수를 뒀다.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떠벌렸고,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잡아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누리를 보면서 생각이 가지런해 졌다. 무리하지 않고 나를 낮추는 것이 가장 좋은 처세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6년 가까이 뒷동산을 산책했으니 안 가본 곳이 없다. 눈을 감고도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누리는 항상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바삭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귀를 쫑긋 세운다. 덕분에 꿩은 거의 잡을 뻔 했고, 가끔 쥐를 잡아와 나를 놀라게 했다. 청설모는 매번 놓치면서도, 항상 경이롭게 바라봤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말이다. 호기심 가득한 누리 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20년차 회사원은 그렇지 못하다.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통로를 지나 똑같은 역에서 내린다. 똑같은 현관문을 통과해 똑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똑같은 층에 내려 똑같은 곳에 똑같은 지문을 찍고 똑같은 책상에 앉아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인사를 한다. 이런 내 삶을 누리도 아는 듯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일상은 기적입니다. 매일 똑같아 보여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햇볕도, 바람도, 땅도, 이웃도 항상 어제와 다릅니다. 그래서 늘 재미있고, 언제나 호기심이 넘칩니다. 오감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 우주에서 똑같은 건,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뿐일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내가 누리를 ‘견선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탁오는 『속분서』서문에서, 50세 이전의 자기 삶을 개에 비유했다. 다른 개들이 짖으면 더 크게 짖었고, 누군가 왜 짖느냐 물으면 다른 개를 따라 무작정 짖었다며 반성했다. 이탁오는 개를 오해했다. 개가 짖는 건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삼라만상의 변화에 감동한 탓이다. 그 감흥을 표현하는데는 어떤 형식이나 편견도 없다. 골방에서 혼자 낄낄대지도 않는다. 이웃과 허심탄회하게 크게 어울린다. 그러다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족하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를 알았다면,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 견선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이탁오도 인정했을 것이다.
머그컵에 담긴 강아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개공장. 생명까지 상품으로 파는 세상이다. 견선생은 돈에 매몰된 인간성에 일침을 준다. 내 안에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고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웃 그리고 생명과의 온전한 교감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