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반 일리치의 죽음-나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

by life barista

영혼과의 대화


이반 일리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왜 저를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겁니까? 왜 도대체 왜 절 이렇게까지 괴롭힌단 말입니까?“


그는 ‘왜’를 여러 번 사용했다.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처참한 고통에 아무런 이유도 없을 리 없다. 이유라도 안다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아무 잘못 없이 이런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비극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이유 없음’이란 악마의 다른 이름 아니었던가.


바로 그 때,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영혼의 목소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생각의 흐름이 이반 일리치에게 감지되었던 것이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반 일리치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영혼과의 대화는 이어졌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 거 말이냐?’

‘전에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지, 기쁘고 즐겁게.’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이반 일리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땐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느꼈던 모든 일들이 토할 것 같이 역겨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죽음이 작동한 날로부터 가까울수록 기뻤던 일들은 덧없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그러한 삶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하루를 살아내면 하루가 죽어가는 삶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반 일리치는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역겨운 것일 수는 없다고 저항했다. 무슨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분명한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자신의 삶을 탐색해 보았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수수께끼를 그 역시 나처럼 인과응보로 여겼던 것이다. 죽음은 내가 잘못 산 것에 대한 처벌이어야 한다. ‘잘 살았다면 난,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능성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잘 살면 이 참혹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고 싶었다.


이게 뭐야? 정말로 내가 죽는단 말인가?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이젠 정말이야. 왜 이런 고통을 내가 겪어야 하지? 그러면 또 내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나는 깜짝 놀랐다. 평범하고 착실했던 한 인간의 고통은 순수했다. 인간이 죽어가는 고통스런 과정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원래 그냥 그런 거였다. 책을 더 읽기 어려웠다. 치매와 뇌출혈로 고통 받다 죽은 전부장님에게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나의 죽음도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라는 얌전한 문장은 펄쩍 뛰어올라 나의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

한 인간의 존엄한 목숨이 저토록 비참한데, 그것에 아무런 이유도 없다니.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 인간의 고통이 원래 그런 거라면, 인간의 삶 역시 우발적인 사건일 뿐 아닐까?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 여름철 소나기 같은 한바탕 소동 아닌가. 갑자기 퍼 붇다가 이내 사라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를 띄우는 하늘. 그 비에 홀딱 젖어버린 나에겐 언제나 이유라곤 없었다. 그냥 그런 거였다.


“난 죽고 싶지 않아!”라는 작은 고함들이 비명처럼 길게 이어졌다.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들이 불쌍하다는 말 뒤에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이기심 가득한 애원으로 변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통증과 죽음이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죽음 대신 빛을 보았고, 환희를 느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삶의 무의미성에 질식하기 직전, 나는 간신히 마지막 문장을 읽어냈다. 이반 일리치가 죽고 나서 마음속에 되뇌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언뜻 철학자 에피쿠로스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살아있을 땐 죽음이 없고, 죽음이 왔을 땐 이미 내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깔끔하게 설명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과 삶이 마치 동쪽과 서쪽이 정반대 위치한 것처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삶과 죽음을 하나의 동전을 구성하는 양쪽 면으로 본 것 같았다. 죽음이 끝났다는 건, 죽음과 함께 있던 삶이 동시에 끝났다는 말 아닐까.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아닐까.

삶과 죽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왜 마지막에 선언하듯 적었을까. 어둠이 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 듯, 죽음은 삶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인간의 눈이 어둠과 빛이 함께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듯, 인간의 마음은 삶과 죽음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까.


나는 뭔가 꿈틀 거리는 걸 느꼈다. 죽음이 나의 삶을 끝내는 사형 집행원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을 진실하게 만드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있을 수 없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낮과 밤이 하나가 되어 하루라는 시간을 만들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아이라는 생명을 만들듯, 삶과 죽음이 만나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라는 삶의 이유를 만든다고 생각되었다.

이반 일리치가 들었던 내면의 목소리, ‘그냥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는 사실일 수 있다. 인간은 그냥 태어난 것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신이나 운명 등이 부여한 절대적인 삶의 이유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데 삶의 이유는 꼭 필요하다. 인간의 몸은 탄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의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코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우리의 영혼은 삶의 의미를 들이마신다. 삶의 이유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죽음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분명한 삶의 이유와 의미가 있으면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당당하게 입을 연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이유와 의미의 최후 증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이진법으로 바꿨다. 컴퓨터의 0과 1이 수많은 파일과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이 수많은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이진법이 내게 준 첫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삶은 그냥 그런 거야. 삶에 별다른 이유는 없어. 맞아, 그럴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 거야. 아무도 내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 삶에 이유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하나 뿐이야!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거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죽음 때문에 거미줄 가득한 지하창고처럼 변했던 마음에 빛이 들어왔다. 아마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빛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음의 순간에 느꼈던 기쁨을, 나는 지금 여기 내 삶에서 느끼고자 한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는 나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