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반 일리치의 죽음-곧 좋아질 거란 뻔한 거짓말

by life barista

그러나 삶은 인과응보라는 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과녁의 가운데를 향해 날아가다 힘없이 땅바닥에 꽂힌 화살처럼 비참해졌다. 이반 일리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45년의 삶을 살았다. 물론 평범한 일상이란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끔찍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그가 특별히 나쁜 놈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잘산 편에 속했다. 어릴 적 그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학교의 전 과정을 우수하게 끝마쳤다. 사회생활도 잘했다. ‘그가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었다.’ 공사를 엄격하게 구별했고 자신의 권력을 절대 악용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이 ‘별다른 변화 없이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라고 썼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인정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그는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죽음은 강했다. 출생과 더불어 죽음은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강한 힘 중 하나였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는 것이다. 수십년 능숙하게 해왔던 재판업무도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이 재판을 손쉽게 망쳤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죽음이 그를 투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해 이반 일리치의 속사정을 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젖어 들 뿐이었다.



아직 나는 나의 죽음과 대면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만 구경했을 뿐이다. 스스로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죽음에 대해선 가소롭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오직 살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 싶었다. 죽음이란 삶을 끝장내는 나쁜 것이니까, 무의식적으로나마 가능한 한 멀리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보단 다들 그렇게 사니까 죽음에 대한 별생각 없이 남들 하는 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모르면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잠자코 있으라고 배웠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 앞에서 혈혈단신 서 있는 이반 일리치를 보니 솔직히 나는 두려워졌다.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인생을 순조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위험천만한 짐승이 온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일상을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상황을 별일 없다고 해야 할까? 죽음과 눈을 마주쳤다면 나는 얼어붙었을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지만, ‘잘못했다’는 말만 수없이 연발할 것이다. 죽음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살진 않았을 거라며 후회와 분노를 터트리며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삶 전체가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 폐허 속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주는 이물감 때문에 쩔쩔맸다. 딛고 있던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머리 쪽으로 끊임없이 낮아지고 있었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죽음은 나를 행방불명자처럼 취급했다. 아무렇게나 해도 문제없는 존재 말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언제 그가 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세상을 떠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환자를 지켜보는 이 불편하고 갑갑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뿐이었다.


죽음은 인간을 철저한 외톨이로 만든다. 죽음과 눈이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불편하고 갑갑할 뿐이다. 죽음이 사로잡고 있는 자는 오직 ‘그’일 뿐이다. 그 옆에서 간호하는 나는 살아야 하지 않는가? 나와 죽음은 전혀 상관없다, 나를 ‘그의 죽음’에서 해방시켜 달라며 그들의 생기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 어떤 절절한 관계도 죽음의 요새에서 나를 구출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그들에겐 죽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는 치욕스런 외로움에 부르르 떨었다.


아편과 모르핀도 죽음의 고통을 줄여 주지 못한다. 아들과 딸도 죽음을 함께 할 수 없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곧 아주 좋아질 것’이라는 뻔한 거짓말만 했다. 그 거짓말만 남긴 채 그들은 곧 그들의 삶으로 달아났다. 이런 거짓말은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였다.


이반 일리치는 하인 게라심과 함께 있을 때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말에는 자신 역시 죽을 존재라는 진실이 담겨 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솔직한 고백이 깔려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만이 완화 시킬 수 있다. 어떤 병은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의사요 치료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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