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반 일리치의 죽음-죽죽산살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by life barista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

신문 부고란에 발인 요일과 시각이 실렸다. 신문을 돌려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반 일리치의 동료였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고인을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엄격히 구분된다. 산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 죽음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 계산 중이다.



그가 사망하고 나면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고 알렉세예프 자리에는 빈니꼬프나 시따벨이 임명될 것이라는 설이 이미 나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러시아 사람들의 어려운 이름이 생소하고 신기했다가, 직장 동료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에는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냉소를 지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가져다 줄 승진 효과, 즉 개인 집무실이 생기고 연봉도 800루블 이상 오를 것에 대한 기대를 즐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청탁을 넣어 자신의 처남을 좋은 곳으로 전보시키려고 한다. 이제 그는 처갓집 식구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준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타박했던 아내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을 즐기고 있다. 산 사람들은 죽음 속에서나마 이렇게 나름의 살맛을 찾고 있었다.


이후 내용은 1880년 죽음을 둘러싼 러시아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그것과 놀랍게도 비슷했다. “그런데 그분 진짜 병이 뭐였답니까?”, “저는 신년 명절 이후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가봐야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남긴 재산은 좀 있는지 모르겠네요?”라는 익숙말이 오고 갔다.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추도식에 참석해야 하는 귀찮은 마음, 추도식 후 벌어지는 카드놀이, 고인 앞에서 성호를 어떻게 그어야 하고 유족들에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가벼운 고민 등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80년 러시아와 2021년 대한민국이 이렇게나 닮아있다니,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태도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어떤 공통점을 갖는 모양이다. 그것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산 자는 산 자 편에, 죽은 자는 죽은 자 편에 속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통점일 것이다. 생사의 구별은 그 외에 그 어떤 구별도 가벼운 것으로 만드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부고를 읽고,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죽음이 몰고 올 산 사람들의 살맛에늘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리라. 톨스토이도 그렇게 썼지 않은가. 그들 모두가 이반 일리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의심하진 말자. 그들은 모두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란 것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딱히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산 사람은 산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 산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이야 그 어떤 말도 넉넉하게 용서할 수 있는 텅빈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나 역시 이에 동의해왔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나는 동료들과 친구들의 저러한 태도와 말을 원망하진 않을 테다. 사실 죽죽산살(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은 내가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내게 죽죽산살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그 말 때문에 시리고 아팠을 거란 생각을 그땐 전혀 하지 못했다. 죽죽산살은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를 바꾼 말은 아니었을까.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반 일리치의 절친인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이반 일리치와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죽마고우였고, 다 커서는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였다. 두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친구가 몹시 고통을 받으며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그는 갑자기 섬뜩한 느낌을 받았고, 더럭 겁이 났다.


‘사흘 밤낮을 끔찍하게 괴로워하다 죽었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과 겁은 약발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째, 죽죽산살이 죽음을 고인에게만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이다. 뾰뜨르 이바노비치도 “마치 죽음은 이반 일리치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일 뿐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죽음의 분위기에서 간단하게 벗어났다.

둘째, 사실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전해들은 친구의 극심한 고통은 실제 친구가 겪은 것이 아닌, 친구의 아내가 겪은 고통이다. 즉, 산 자의 고통일 뿐이다.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들은 것은 “실제 이반 일리치가 겪은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이 쁘라스꼬야 표도로브나의 신경을 얼마나 자극했느냐”를 그녀 본인의 절절한 표현을 통해 들은 것에 불과하다. 산 자의 생생한 고통은 죽은 자의 실제 고통을 바짝 말라붙게 만든다.


셋째, 산 자의 생계 문제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불쑥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척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국고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선 다 알고 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수 있는 방안이 없는 지 지금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산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이 나온 뒷 배경을 귀신처럼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죽은 이반 일리치의 최고 절친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추도식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이제 이반 일리치가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어떤 고통가운데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갔는지에 대해 마음이 쓰였다. 산 사람의 고통이 아닌, 죽어 가는 사람이 직접 말한 죽음의 과정을 듣고 싶어졌다. 내심, 그가 이렇게 아내와 친구 그리고 동료부터 철저히 외면 받은 상태로 고통 가운데 혼자 죽은 것은 분명 그가 잘못 살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삶은 인과응보니까 말이다. 이러한 단정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것을 미리 즐기면서 나는 책장을 성급하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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