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두 가지 글’이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안에는 작은 ‘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독서를 안 한다고, 책을 읽을 줄 모른다고 꾸짖었던 부모님의 잔소리로 풀이 죽은 아이다.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올 때까지 글을 읽는 게 두려웠다. 역설적인 것은, 한편으로 좋아하는 책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만화책, 판타지 소설, 문학(시는 제외)은 예외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가슴으로 읽히는 책을 좋아했다. 활자를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독해 행위가 아니었기에, 느끼고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교과서를 읽거나, 관심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딱딱한 신문 읽기였다. 신문은 느낄 수 없었고, 그래서 불편했다. 덜 예민한 사람이라면, ‘재미없네… ‘하고 던져버렸겠지만, 나는 늘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신문을 읽다가 머릿속도 하얘지거나, 숨이 막힌 적도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저리도 어렵게 하는 걸까?’라고 혼잣말을 하며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그럴수록 활자의 압박은 심해졌고, 끝내 끓어오르는 가슴의 울분을 참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스스로를 자책했다. “글도 못 읽는 놈!”
내가 그래도 난독증 환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대학에 와서였다. 우연히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 책을 읽을 때만큼은 가슴이 출렁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만화책이나 소설 말고도, 느끼고 빨려 드는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박증’에 시달리던 내게,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나를 이해하고’ ‘나를 다스리는’ 일종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표현하면, 에리히 프롬이라는 저자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다른 심리학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그의 저서는 직접 구매해서, 틈틈이 읽었다. 몸이 울리고 진동하는, 즐거운 만남이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만남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고마운 인연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작가’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들의 속내를 훔쳐보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중권을 만났고, 강신주를 만났다. 니체와 김영하를 만났고, 김애란을 알게 됐다. (비교적 최근의 인연은 ‘안수찬’기자와 ‘정여울’작가다.) 그들이 쓴 글은 나를 끌어당겼다. 활자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내가 하던 고민과, 느꼈던 감정, 어이없는 상상이, 터무니 없지도, 괴이하지도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활자를 싫어했지만, 그들의 글을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을 때면 희열에 찼다.
스스로가 활자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진, 몇 번의 착각에 빠진 적도 있다. ‘내가 비로소… 드디어… 책읽기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교양인이 되었구나!’라며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나만의 취향을 저격하는 영혼과 감성을 지닌 저자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세계에 머물기를 꿈꾸는 고독하고 이기적인 영혼이다. 가슴으로 끌리지 않는 활자를 인내심 있게 들여다보고, 억지로라도 이해해보려는 넓은 마음이나 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활자에 대한 공포도 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천성이 거부하는 행위를, 반드시 읽어내야만 한다는 불안과 압박 속에서 꾸역꾸역 해내려 했던 날들. 왜 그랬던 걸까? 유년 시절에 겪었던 부모님의 아픈 평가를 뒤집어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여린 꼬맹이가 조금도 자라지 못한 탓일까?
그래서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분류법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일단 ‘책’이라는 어휘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신, 세상엔 ‘두 가지 글’이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가 쓴 글’과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똑똑한 분들께서 써주신 재미없는 글’ 이렇게 말이다. 전자가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유혹하는 글이라면, 후자는 나를 지구반대편까지 밀어내는 글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훌륭한 작가의 글도 있겠지만, 굳이 억지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살다가 우연히, 좋은 인연을 맺는 것처럼, 예고 없이 그들과의 소중한 만남이 성사되리라 믿는다. 지금껏 만난 몇 안 되는 작가와의 첫 만남도, 항상 그런 식이었다. 문제는 ‘똑똑한 분들의 글’이다. 웬만하면 멀리하려 한다. 오감을 닫게 만드는 재미없는 글을 읽는 행위는, 고통이고 지옥이니까. 하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활자도 존재한다.(가령 신문처럼) 그런 건 그냥, ‘교과서’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교과서는 학생 시절 나의 최대의 적이었다. 교과서 좀 못 읽는다고, 이해 좀 못한다고 부끄러울 건 없다. 큰 맘 먹고, 넓은 아량을 베풀어, 교과서와 얘기하며 놀아주겠다. 아마 무슨 소린지 대부분 이해 못할 것이다. 그래도 쫄지 말자. ‘교과서’ 잘 읽고, '의미 파악' 잘 한다고, 내 삶이 즐거워지진 않는다.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고, 코인노래방을 가는 게 내겐 훨씬 즐겁고 대단한 일이다. 기타나 연주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