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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유목민 Mar 28. 2019

'이해받음'은 채울 수 없는 결핍 같은 것

2019년 3월 27일의 일기

온 몸 구석구석이 터질 것처럼 아픈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도통 감정이 말을 듣지 않는다. 칼바람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고, 마음은 뜨거운 불길에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두렵기도 하고, 반항심이 들기도 한다. 두려움은 날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걱정하는 마음일 것이다. 반항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을 수 없는 나만의 원칙에 대한 고집이다. 타협하는 법을 모르기에, 나는 미련하게 갈팡지팡한다. 검열과 긍지의 사이 어딘가를 헤맨다. 과거에도 줄곧 그래왔다. 현재에도 그런 걸 보니, 미래에도 그럴 것이 뻔하다.


내 마음의 주인은 ‘긍정’이라는 녀석도, ‘부정’이라는 녀석도 아니다. 내 가슴 한 구석에 마련된 이 초라한 왕좌의 주인은 세상에 없다. 마음이 누군가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는 날, 내 삶의 생명력도 함께 소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환, 후회, 의심 속에 파묻혔던 적이 있다. 그  날은 세상과 나의 절교가 시작된 날이었다. 희망, 꿈,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살던 적도 있다. 그것은 잔인한 현실을 두 눈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도망간 가상의 낙원이었다. 세상과 등을 지고 평생을 보낼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안락함에 기댄 채 살 수 없는 것이 하루하루의 삶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흐림과 맑음을 반복하는 날씨처럼, 봄과 겨울을 오가는 계절의 법칙처럼, 늘 변화무쌍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와 마주하고, 느끼며, 견디어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감정의 번잡함과 요동침을 누군가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소망임을 안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들어주는 이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인내와 배려가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해는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요즘 느끼는 것은, ‘이해받는다’라는 표현이 근본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채울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거짓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의 몸으로 살아보지 않는 이상 결코 체험할 수 없다. 타인의 이해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타인이 들어와 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것을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니, 욕심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을 통해 채울 수 없는 것을 사람을 통해 채우려는 순간, 나를 기다리는 앞날은 언제나 폭력과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누군가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나보다. 아니,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나보다. 글을 쓰면 나의 번잡한 감정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될지언정, 잔인한 폭력배가 되진 않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일도 없다. 들쑥날쑥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정리되지 않던 생각도 정돈된다. 물론 결핍이 부르는 욕망의 유혹을 뿌리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어리고, 그래서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하지만 과감하게 끊어내려고 벌버둥 쳐보고 싶다. 그래야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사람을 통해 메우려는 잔인한 폭력의 고리를.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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