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의 일기
내 몸의 온도는 들쑥날쑥하다. 냉탕과 열탕을 정신없이 오갈 때가 많다 어쩔 땐 냉혈한 독사처럼 싸늘해진다. 어떤 날에는 폭주하는 경주마처럼 활활 타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 지낸 것도 그래서였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변화무쌍한 나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가 화낼 땐 디일까 무섭고, 차갑게 몰아붙일 땐 간담이 서늘해져 겁이 난다.”라는 식의 말을 듣곤 했다. 나에 대한 그들의 짧은 감상평을 나는 쉽게 웃어넘길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타인에게 기쁨보단 슬픔을, 즐거움보단 아픔을 주는 못난 놈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들에 자주 상처를 받았고, 언제나 자책을 했다. 그리고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기도 전에, 가혹한 채찍질을 이어가며 다짐했다. ‘섣불리 화내지도, 섣불리 차가워지지도 말자.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비극이 찾아오기 전에’
그래서 가면을 쓰고 살았다. 화를 낼 줄 모르고, 차갑지도 않은 착한 아이로 말이다. 하지만 완전한 연극은 불가능하니, 기왕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냉탕보단 열탕을 골랐다. 한국의 친구들은, 한국의 어른들은, 한국의 선생님과 제도는 차갑고 냉철하게 쏘아붙이는 인간보다는, 열기가 다소 부담스러울지언정 따뜻함과 단순함의 미덕을 보여주는 열정적인 청년을 좋아하는 겉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지 않으려면,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내겐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10년의 기간은 적어도 가면을 유지한 채, 쫄아서 웅크리는 삶은 아니었다. 대신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나란 놈의 맨 얼굴을 확인해보고자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정말이지 남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기 힘든 인간. 까탈스럽고 싸가지가 없는 녀석. 이것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는 나에 대한 말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의 부정도 실례인 것 같다. 분노와 독선이 느껴지는 불같은 말투, 작은 단점까지 하나하나 파고들어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는 갑분싸 메이커. 부정할 수 없는 나만의 피곤한 기질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다지 건설적이지 않을 것 같다. 대신 극단의 온도차를 뿜어내는 나의 몸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보기 좋은 열정으로 포장하는 일도 그만 멈출 생각이다. 대신 차갑게 살기로 했다. 마치 맛 좋은 소주의 온도를 냉장고에서 15~18℃로 유지하는 정도의 차가움이다. 얼어붙을 정도의 냉혹함은 아니기에 타인에게 싸늘한 상처를 줄 위험은 다소 적어질 것 같다. 무엇보다 열정의 가면을 쓸 때보다, 내 마음이 한 결 편하다. 적절히 화를 다스리는 게 멘탈 관리에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당분간 되뇌고 또 되뇌며 살아갈 생각이다. ‘내 몸의 온도를 18℃도로 관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