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판의 '현실적 낭만주의자'
나는 잉글랜드 축구팀 리버풀 FC의 감독 위르겐 클롭을 좋아한다. 그는 축구판에 얼마 되지 않는 ‘낭만주자’다. 낭만주의의 정수는 ‘인간성’을 향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다. 우주의 질서도, 신이 만든 율법도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닌 감정과 본능을 구속할 수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자주 사랑을 노래한다.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예찬한다. 위르겐 클롭에게 축구는 자본의 논리에 포획된 스포츠이기 전에 인간의 본능과 충동이 부딪히고 폭발하는 예술이다. 그는 예술이 그러하듯 축구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돈’이 축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축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의 완성된 팀을 구성하는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팬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다. 그가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감독 전용 벤치에 앉아있는 일은 드물다.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팀이 화끈한 공격을 할 때면 그도 주먹을 불끈 쥔 채 온 몸을 흔든다. 팀이 수세에 몰려 위기에 빠지면 놀란 가슴을 몸짓으로 쓸어내린다. 득점에 성공하면 한 마리의 맹수처럼 포효한다. 실점했을 땐 홈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독려한다. 경기장에서 그는 팀의 감독이기 전에 전장을 지배하는 지휘관이다. 승리를 갈망하는 그의 욕망과 충동은 전염병처럼 곳곳으로 퍼져나가 선수와 관중들을 감염시킨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팀의 색깔을 헤비메탈 음악에 비유한다. 헤비메탈은 강렬하지만 섬세한 록음악이다. 듣는 이의 신체와 정서를 자극하는 건 모든 음악이 지닌 공통점이지만, 헤비메탈은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거칠게 증폭된 소리 안에는 기성세대의 문화를 거부했던 록음악의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섬세한 연주와 세션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뛰어노는 고음의 목소리는 장르가 지닌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헤비메탈은 거칠지만 투박하지 않고, 공격적이되 폭력적이진 않다. 그가 추구하는 축구 철학도 그렇다. 리버풀은 강력한 압박으로 위압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상대를 혼란에 빠트린다. 하지만 선수 개개인의 움직임은 섬세하게 구성된 악보처럼 유기적이고 조직적이다. 그래서 리버풀은 축구는 아름답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오감을 자극하는 예술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그는 ‘돈의 논리’가 축구를 지배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축구는 명실상부한 팀스포츠다. 그리고 그가 믿는 좋은 팀의 요건은 구성원들 간의 끈끈한 연대다. 클럽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감독과 선수와 팬이 만나 한데 어우러지고, 나아가 헌신, 협력,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가 무럭무럭 자라날 때 팀은 견고해지고 강해진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는 팀이 쪼개지는 걸 경계한다. 특히 자본의 침투가 만들어내는 균열에는 훨씬 더 예민하다. ‘돈의 힘’은 언제나 위협적이다. 공동체의 연대도. 사람 간의 사랑도. 인간의 존엄성도 돈 앞에선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다. 축구판에서 선수가 돈을 많이 주는 클럽으로 이적하는 경우는 흔하다. 거꾸로 값어치를 못하는 선수는 가차 없이 클럽에서 쫓겨난다. 선수가 축구를 하는 목적이나 이유도, 구단이 팀을 운영하는 기준의 척도도 모두 ‘몸값’이 됐다. 위르겐 클롭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만 순응하진 않는다. 그는 ‘자본’에서 자유로운 ‘축구’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그는 낭만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감독의 전술과 능력을 평가할 줄도, 클럽의 전통과 역사를 논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타자를 보고 느낀 감흥을 주저리주저리 떠들 줄은 안다. 위르겐 클롭은 그런 내가 보고 느끼며 자극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어떤 면모가 나의 정서를 자극했던 것일까. 제일 먼저 나를 끌어당긴 건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동물적 본능’이 아니었나 싶다. 터치라인 근처에서 온갖 제스처로 감정을 표출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나의 가슴도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요동쳤다. 마치 내가 실제로 경기장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몸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감정들이 살아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야수적 기질은, 그걸 보는 나도 한 마리의 야수로 만들었다. 리버풀이 골을 넣으면 나도 그처럼 어퍼컷 세리모니를 날렸고, 실점을 하면 머리를 감싸고 탄성을 질렀으며, 경기에서 이기면 승리에 도취돼 며칠을 희열 속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전에 ‘감정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위르겐 클롭은 내가 지금껏 잊고 살던 그 간단한 진리를 다시금 깨우쳐줬다.
따지고 보면 축구는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 중 하나다. 선수를 움직이는 것도,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육감’이다. 축구에서 전후반 45분은 선수들의 몸과 몸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격투장이다. 한 번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곤 선수는 언제나 피치 위를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경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웬만한 몸싸움은 용인된다. 심판이 복잡한 규칙을 빌미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일도 드물다. 덕분에 축구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발과 머리고 공을 운반하여 상대편 골대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자연스레 경기를 바라보는 관중들의 사고도 간단하고 명료해진다. 한 수, 두 수 앞을 내다보며 두뇌의 이성과 통찰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저 몸과 마음으로 반응하고 흥분하면 된다. 위르겐 클롭은 이러한 ‘축구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 그가 지휘하는 팀은 경기장에서 이 사소하지만 중대한 진리를 구현해낸다. 그러면서도 예술적이다. 마치 헤비메탈 음악처럼.
그의 ‘낭만주의적’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클롭은 ‘낭만주의자’이지만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공상과 낭만에만 취해있다면 세계적인 프로 리그에서 감독직을 맡을 수도,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그는 ‘현실적 낭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자 강신주는 이런 말을 했다.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다” 꿈과 이상의 벽은 언제나 높고 가파르다. 대개 이들은 우리가 발붙이고 서 있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꿈과 이상을 냉소한다. 헛된 망상이요 실현될 수 없는 몽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가슴 깊은 곳에 뜨거운 이상을 품은 채 현실을 살아간다. 꿈을 꾸지만 현실을 외면하진 않는다. 오히려 저 높고 가파른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닥쳐오는 거친 비바람과 장애물을 견뎌낸다. 어쩌면 이들의 초점은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이상에 가닿으려고 몸부림치는 ‘현실 극복’에 맞춰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언제나 ‘열정’과 ‘희열’로 충만하다. 클롭도 그런 사람 같다. 그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끈덕진 연대와 사랑을 동력으로 삼는 팀을 만들려고 한다. 그저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원초적이며 아름다운 ‘헤비메탈 축구’를 구현하려 한다. 축구를 단순한 ‘관조’내지 ‘관람’의 스포츠가 아니라,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팬이 함께 부대끼며 열광하는 원시 공동체적 집단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