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유목민 Sep 18. 2017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으로 읽는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자'도 나이가 들면 '인간'이 된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다시 읽었다. 다시 만난 작품의 세계는 익숙했지만 새로웠다. 예상했던 대로 소설의 ‘서사’나 ‘반전’이 제공하는 장르적 쾌감은 크지 않았다. 읽은 지 3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대강의 줄거리가 여전히 내 기억 속을 춤추고 다녔던 탓이다. 하지만, 새롭게 읽히는 부분도 있었다.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이자 냉혹한 살인자이기도 한 ‘김병수’의 내면이었다. 3년 전에는 공감하지도 가닿을 수도 없었던 잔혹한 살인자의 마음이 이번엔 희미하게나마 와 닿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뒤, 나의 가슴 속에 떠오른 어휘는 오로지 하나였다. ‘나이듦’. 나는 이 소설이 인간이라면 한사코 피해갈 수 없는 ‘나이듦’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새롭게 읽어낸 이 소설의 테마였다.     


김병수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오만한 노인이다. 그는 사회의 법과 윤리를 철저하게 냉소한다. 더불어 그러한 규범적 틀로부터 자유로운 스스로를 긍정한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감정의 동요 없이 사람을 죽이고, 죄의식 없이 살아간다. 법의 처벌도 대수롭지 않아한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훗날의 살인을 기약한다. 거꾸로 그는 삶 속에서 마주치는 타인을 비웃는다. 스스로를 ‘악마’ 내지 ‘초인’이라고 믿는 그에게 법과 도덕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범인들은 나약한 겁쟁이들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무장한 ‘살인자의 철학’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그렇게 그는 마치 세상의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고독한 선지자라도 되는 것 마냥 남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추어올린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김병수는 치매에 걸린다. 그리고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다. 단단했던 그의 내면에도 균열이 생겨난다. ‘공포’와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고, ‘좌절’과 ‘불안’이 그를 엄습한다. 그는 일평생을 ‘짐승’처럼 살아온 인물이다. ‘짐승’에겐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도 없다. 연민이나 동정은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짐승들에게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도 그랬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앞에서 그도 어쩌지를 못한다. 인생의 새로운 난적 ‘알츠하이머’는 점점 이 잔인한 살인자를 평범한 70대 노인으로 탈바꿈시킨다. 법과 도덕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한 명의 자유인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망각’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김병수는 이제 ‘육감’과 ‘본능’의 세계에서 쫓겨나 나약한 ‘정신’의 세계로 떠내려 온다. 그렇게 ‘초인’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되어버린 김병수는 난생 처음 필요에 의한 살인을 결심한다. 그는 금전적 이유나 변태성욕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를 추동했던 힘은 언제나 ‘충동’과 ‘희망’이었다. 그는 언제나 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몸이 살인을 주문하면,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살인 뒤에는 언제나 아쉬움이 뒤따랐고, 아쉬움은 곧 희망이 됐다.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그가 또 다른 살인을 기약하는 동기가 됐다. 하지만 칠십의 나이에 치매를 앓고 있는 지금, 그는 그의 딸 ‘은희’를 지키려고 살인을 준비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신은 나에게 내가 저지른 악행의 신성을 스스로 진부하게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예술적 살인자’였던 그는 ‘남루한 범죄자’가 된다.       

        

김병수가 25년 전 갑자기 살인을 관 둔 것도 어떤 ‘변화’를 직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마지막 재물이었던 은희 엄마를 살해한 후 두 가지를 상실한다. 하나는 ‘충동’이다. 시를 읽어 서였을까. 그는 ‘반성’과 ‘반추’의 감정이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짐승이 인간이 되어간다는 증거였다. 다른 하나는 ‘희망’이었다. 그의 마지막 살인은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아쉬움’이 아닌 ‘실망감’을 느낀다. 다음 살인을 오늘보다 더 잘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예감한다. ‘희망’ 대신 ‘비관’이 자라나고 그는 살인을 멈춘다. 아마 김병수는 그 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살인을 추동하던 동력이 점점 희미해져갈 것임을. 사람들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자살을 결심한다고 한다. 김병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더 나은 살인을 기대할 수 없기에 그는 살인자로서의 지위에 사형 선고를 내린다. 그는 모든 변화가 뇌수술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원인은 생물학적 시간에 있다. 그의 신체도 나이를 먹어간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추억한다. 날마다 살인을 도모했던 시절, 그는 한 마리의 맹수였다. 잠에서 깨어나면 주린 배를 달래고자 사냥을 했다. 사냥감을 쫓느라 지치는 줄 몰랐고, 식사가 끝나면 근심 없이 잠을 청했다. 동물은 인간처럼 ‘과거’를 후회하지도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현재’에 몰입한단다. 김병수라는 맹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었던 삶. 온 몸이 바짝 조인 현처럼 팽팽했던 날들. 그는 그 때가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즐거웠다고 반추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몰입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를 오간다. 몰입하지 못한 채 진부한 일상을 살아간다. 거기에 ‘치매’는 덤이다. 김병수는 자문한다. “늙어서일까” 나는 그가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한다.     


몸도 정신도 무너져버린 노인의 최후는 아름답지 않다. 그는 몰락한다. 어쩌면 ‘맹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인을 계획한 순간부터, 그의 파멸은 예견돼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는 보통의 인간과 다르다. 매 순간 기억을 까먹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게임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젊은 날의 그였더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싸움이다. 하지만 김병수는 이를 감지해내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는다. 박주태가 살인자라는 확신. 요양보호사 은희가 자신의 딸이라는 믿음. 자신의 판단이 절대로 잘못됐을 리 없다는 오만.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김병수를 혼돈에 빠트리고, 그는 결국 경찰에 붙잡힌다. 오랜 세월 공들여 연출해왔던 그의 살인자로서의 삶도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 누구도 김병수의 살인을 악마적이고 예술적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세속적 범죄라며 손가락질 할 뿐이다. 김병수는 수치스러워한다. 그에겐 그것이 형벌보다 무서운 처벌이다. 이야기 끝에서, 그는 패배를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몇 달 전, 아버지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내일 모래 예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삶의 낙’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없다’였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면 특별히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일도 없이 그냥 산다.”고 하셨다. 말투에선 아쉬움과 씁쓸함이 묻어났지만 슬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이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나이듦’을 대하는 아버지만의 정서적 태도이자 방식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온 몸에 혈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다. 퇴근 후엔 언제나 운동을 하셨고, 취미론 댄스스포츠 즐기셨다. 대충 하는 법이 없어, 잘 할 때까지 하셨다. 그만큼 ‘몰입’의 강도도 컸을 것이다. 그랬던 분이 특별한 재미없이 삶을 산다고 하시니, 그간 지켜봐왔던 모습만을 기억하는 아들로선 놀랄만한 일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이 ‘희열’과 ‘즐거움’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나의 아버지의 마음이나, ‘몰입’ 속에서 살았던 과거를 추억하는 김병수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다행히도 아버지는 새로운 ‘몰입’거리를 찾으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요즘 몸을 쓰는 운동 대신 머리를 쓰는 공부에 집중하신단다.     


‘나이듦’을 짐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나이듦’이란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다. 짐작이나 추측으론 알 수 없다. 오로지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차이를 감지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다. 내 몸 안의 생물학적 시간은 아직 늦은 오후에 접어들지 않았기에 ‘나이듦’이란 당분간 나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김병수의 ‘내면’을 깊이 있게 공감하지 못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대신 소설을 읽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몰입’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 김병수와 나의 아버지의 시각을 빌려 본다면, 나의 현재는 적어도 ‘나이듦’이라는 숙명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시기다. 바짝 조인 현처럼 온 몸이 팽팽하고,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처럼 오감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때이다. 나는 과연 생애를 통틀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이 시기를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의미 없는 걱정이나 예단으로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지도 않는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도 희미하다. 근래의 삶 속에선 행복과 희열에 젖었던 적도 많지 않다. 몰입할만한 일을 찾았는지도 의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설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해볼 만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 앞으로도 ‘나’라는 배는 미지의 세계와 끊임없이 조우하며 불확실한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삶의 방향도 목적지도 속도도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여정이 되겠지만 한 가지는 굳게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몰입’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라는 것. ‘몰입’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면, 그래서 ‘나이듦’이 찾아와도 ‘몰입’의 세계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진부한 현실을 한탄하며 과거를 추억하는 김병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