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위기는 소중함을 상기시켜준다
대학생 시절, 교내 토론 동아리의 회장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애초에 자의보단 타의로 맡게 된 자리인데다, 천성이 조직의 리더와는 맞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하루빨리 임기가 만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리를 향한 이렇다 할 애정이나 책임감도 없었다. 그저 유능한 후배들을 발굴하여 동아리의 실낱같은 명맥을 이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교내 동아리를 총괄하는 학생회 소속 간부로부터 연락을 한 통을 받았다. 그는 대뜸 우리 동아리가 제명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명 사유는 동아리 대표 회의 무단결석이었다. 모교에선 1년에 두 번, 전체 동아리의 대표자들을 불러놓고 동아리의 운영과 학생 자치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동아리 회장이라면 필히 참석이 요구됐고, 무단 불참 시 학생회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물론 나는 맹세코 불참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높으신 학생회 간부들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때까지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회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애초에 일개 동아리의 자초지종을 들어주는 자리 따윈 없었다. 대신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나는 예비 징계 대상자로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징계위원회는 원칙과 절차에 따라서 진행됐다. 원칙과 절차에 대해 무지하고, 확실한 증거도 갖추지 못한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다가 억울함 못 이기기고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 그쪽은 저희의 불참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가 녹취록을 확보했습니다. 다만 원칙상 자료를 공개하긴 어렵습니다.” 그렇게 우리 동아리는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미지의 증거 때문에 ‘제명’ 이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심박 수가 고동치기 시작한 것은.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눈앞에 닥치자, 근거 없는 낙관으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나의 마음은 불안으로 요동쳤다. 하루는 막막하고 무기력한 마음도 달랠 겸 늦은 밤 동아리방을 찾았던 적이 있다.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은 왁자지껄 떠드는 선배와 후배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누구는 아늑한 쇼파에 기댄 채 술기운을 달래고 있었고, 어떤 이는 통기타를 퉁기며 노래에 취해 있었다. 한쪽엔 테이블에 둘러앉아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알 수 없는 감상에 빠졌다. 만약 동아리가 제명된다면 이런 광경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게 뻔했다. 퇴거 명령이 떨어질 것이고, 우리는 잠을 청할 쇼파도, 기타의 반주에 맞춰 노래할 공간도, 불편하고 심각한 담화를 이어갈 테이블도 잃게 될 것이다.
그 날, 모두가 떠난 동이리방에 나는 홀로 남았다. 절박한 상황이 닥쳐오니 평소 신경도 쓰지 않던 책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책과 노트들이 꽂혀있던 그곳에서 나는 ‘날적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노트 한 권을 꺼내들었다. 과거 선배들의 펜글씨가 곳곳에 적혀 있는 걸로 보아 동아리의 ‘집단 일기장’정도 되는 것 같았다. 첫 장을 넘기니 다음 장이 궁금해졌고,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새로운 노트가 나를 유혹했다. 그렇게 새벽 내내, 누군가가 썼을 오래된 글을 읽었다. 2006년 뜨거운 여름에 기록된 글도, 1999년 한겨울에 쓰인 글도 읽었다. 한 줄 한 줄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내가 동아리에 대해 아는 게 너무나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확신했다. 25년 넘게 버텨온 동아리의 역사가 이대로 끝나선 안 된다는 것을. 지나간 선배들의 흔적이 사라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후, 나는 100여 명의 학생들 앞에 섰다. 그 날은 제명 여부가 투표로 결정되는 날이었다. 투표 전 내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최후 발언’의 기회였다. 무슨 말이든 해서 투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자리에 앉아 날 바라보는 각 동아리의 대표자들과, 학생회 간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억울함을 따지지 말고, 절박한 마음만을 전달하자고. 동아리의 명맥을 이어가고 싶은 나의 진실한 마음을 담담하게 전하는 게 내가 다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그렇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 아닌 호소를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투박하고 촌스러운 말이 난무한 5분이었다. 하지만 진실된 마음엔 거짓이 없었다. 무언가를 향한 애정을 그토록 진솔하게 드러낸 것은 그 때가 태어나 처음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동아리방으로 돌아오는 길, 진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던 기억이 난다. 가까스로 동아리방에 다다른 나는 그대로 쇼파에 주저앉았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긴장이 풀려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노래방을 갔던 기억도 난다. 소중한 것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이 반,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반이었다. 동아리의 운명을 가른 건 단 10표였다. 10표 차이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위기에서 동아리를 구해준 10표를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있다.
잃어버린 뒤에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하던가. 그 날의 경험으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됐다. 상실의 문턱 앞에 이르러서야 나는 동아리가 사라져선 안 될 소중한 보금자리였음을 깨달았다. 그 때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동아리는 여전히 별 감흥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가끔 동아리방을 찾는다. 그 때의 사건이 귀감이 됐던 것인지, 다행히 비슷한 일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자주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회의에 참여하면 반드시 인증샷을 남겨두라고. 그것이 동아리를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그 일이 있고 몇 개월이 지난 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 동아리 후배 한 명이 학생회 소속 간부와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간부는 징계위원회를 전담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술김에 후배에게 이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사실 너희 동아리 확 없애버릴까 했는데 한 수 접고 살려줬어, 다행인 줄 알아” 동아리문화의 발전과 학내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투표로 선출된 학생회 소속 간부들께서, 사회에 진출하기 전부터 벌써 권력을 남용하는 방법을 학습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비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웃긴 건,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동아리 학생회장이 학내 부정 선거의 주범으로 밝혀져 직위를 박탈당했다는 사실이다. 부정 선거의 당사자로 밝혀진 그 학생은, 징계위원회가 열렸던 당시, 나에게 무미건조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이였다. “저희가 녹취록을 확보했습니다. 다만 원칙상 자료를 공개하긴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