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정에 대하여
우리가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생각했다.
거의 1년 만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가
내게 왜 살이 빠졌느냐고 물었다.
모두가 살이 빠진 것 같다고만 이야기할 때
그 친구는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순간 깨달았다.
우리가 어쩌다 친구가 되었고
왜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는지.
그 친구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조차도 잊고 살아가고 있을 때
나의 아픔을 일깨워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그 친구가 오히려 존경스럽다.
모두가 나약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감성에 치우친 사람 취급을 할 때
유일하게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사람.
유일하게 나를 ‘나’로 봐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조차도 ’나‘를 잠시 잊고 살아가는데.
살아가기 위해 ‘아픔‘ 따위는 잊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타인을,
’나’라는 사람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걸까?
그리고
그 한마디에 나는 너무 쉽게 치유가 되었다.
마치 그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픔’을 느끼고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은 나를 ‘나’로 허락하지 않는데
어디에도 ’나’를 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 친구가 유일하게
너무 쉽게 ’나‘의 시간을 허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 속
또 한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