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런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이 있었을까.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큰아버지의 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깡촌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대학교를 다니기 전, 첫째 큰아버지 댁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헷갈릴까 봐 이제 말하자면 보증을 서 주었던 집이자 나의 아버지 어머니로 계셨던 분들은 둘째 큰아버지 둘째 큰어머니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어야 했다.
"네가 무슨 대학을 간다고 그러니. 누가 보내준다고."
첫째 큰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내가 너 밥 해주는 사람이니? 네가 이 집 들어오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일주일쯤 있었을까. 그렇게 쫓겨나고야 말았다. 그때 큰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내 탓인것 같았는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쫓겨난 뒤로, 나는 그 큰어머니를 위해 금식기도를 했다. 그때는 교회를 독실하게도 믿던 때라(내가 의지할 곳이 교회뿐이었다) 그런 선택을 했다. '저 몸에서 사탄이 물러가게 해 주세요' 같은 기도를 했어야 했는데, '큰어머니의 병이 낫고, 마음이 평화를 찾게 해 주세요'따위의 기도를 해버렸다. 젠장.
그래도 어찌어찌 대학교는 들어갔다. 지방이지만 국립이라서 등록금이 비싸지는 않았다. 1학년 때는 할머니와 삼촌의 도움을 조금 받았고, 1학년 2학기부터는 쭉 장학금을 타서 생활했다. 생활비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벌었다.
그렇게 대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에게 찾아갔으나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나는 아버지가 사는 평택 언저리에 여자인 친구와 함께 살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같이 살다 보니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1년 후 방을 비우기로 했다. 돈이 나와야 이사를 가는데 이사를 가야 돈을 빼주니, 당장 갈 곳이 없어서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는 시골에 잠시 가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멈추게 한 아버지의 말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가서 괜히 폐 끼치지 말아라. 고시원에 가든지 해."
그건 아마도 갈 곳 없어진 나의 사정을 알게 된 고모가 아버지에게 한 말일 것이다. (추후에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고모에게서 문자로 왔기에 그렇게 추측이 되었다)
아, 나는 그냥 폐 끼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리 도움 되는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때까지도 밥도 제대로 할 줄 몰랐으니까. 갈곳 없어진 나는 정말 원치 않는 선택을 해야 했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로 한 것이다. 어린 시절, 많은 일을 당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아버지는 딸이 걱정되어 노심초사한다던데. 정말 그런 아버지들이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현실감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남자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몇 개월 가량 돈을 모아 다시 평택으로 왔다. 아버지와 가족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이때는 번호를 바꾸고 모든 가족과 연락을 단절했다.
그렇게 철저히 고아가 되기를 선택한 나는 사람이 고파 하나의 가면을 썼다.
YES맨이라는 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