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다 보면 분노게이지가 쌓이고, 결국은 활화산이 되어 폭발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그러다 보면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 또 나의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나의 성격적 결함의 원인을 뒤져보게 되기도 한다.
물론, 나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겠지만 원인이 거기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트라우마나 성격적 결함이 없는 부모라 할지라도 육아를 하며 분노를 느끼는 것을 같을 테니까. 특히나 한국에서의 육아는 인간적인 본능을 누르고, 억제하며 이어지는 길고 긴 과정이기에 더 그런 듯도 하다.
그러면, 그 분노를 어떻게 우리는 어떻게 누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누르는 게 맞을까?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니다. 분노는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잘 다루어내야 하는 감정이다.
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침전되어 더 위험한 형태로 변형됨을 의미한다.
융은 한쪽으로 치우친 억압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그는 분노 억제가 초래하는 주요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노를 억제할수록 무의식 속의 그림자는 점점 더 크고 어두워진다. 융은 "그림자를 의식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운명이 되어 우리 삶을 지배한다"라고 말했다. 억눌린 분노는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인 힘을 갖게 되며, 결국 통제 불가능한 폭발이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이다.
육아에서 오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있던 필자는, 어느 날 아이의 분유를 타다가 가루가 흘러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사실 평소 어질러지는 것에 강박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가까운 사람이었음에도. 그나마 '괴성'에서 그친 정도라 다행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유독 공격적이거나 화가 나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대인관계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며, 상대방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회피하려 한다.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가끔 화나 짜증을 표출하면서도 배우자가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표출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혹은 내가 아이들에게 화가 나 있으면서 아이들이 나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억제된 분노는 두통, 소화기 장애, 만성 통증 같은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나거나,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변해 우울증이나 만성적인 무기력증을 유발한다. 분노의 에너지를 억누르는 데 너무 많은 정신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 질환, 이혼, 그리고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만 봐도 분노의 억압이 불러오는 결과물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치게 온순하고 친절하려고 분노를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파괴적인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눈이 돌아간다고 표현해야 할까. 만일 내 안의 분노를 꾹꾹 눌러 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폭발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노들을 우리는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융은 분노를 없애야 할 악이 아니라, 자아 성찰의 도구로 보았다.
의식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나의 그림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면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 분노 속에 담긴 강력한 에너지를 창조적인 활동이나 등으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분노를 무조건 억누르기보다는 그 감정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말 그대로 내가 어떤 지점에서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왜 거기에서 분노를 느꼈는지를 살펴보라는 이야기이다.
필자의 경우,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짓누르고 있다.
약간의 완벽주의와 약간의 강박을 가진 사람으로서 혹시나 아이가 어떻게 될까 늘 전전긍긍하며, 규칙이란 규칙을 다 지키려고 하고 있다.
45개월 32개월 된 두 남자아이를 케어하며 아직 TV도 보여주지 않고, 과자도 주지 않는다. 아이 앞에서 스마트폰도 되도록 하지 않으며, 술도 아이 앞에서 마시지 않으려 지금은 거의 끊은 상태다. 남편과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또,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어야 하니 아이의 이야기를 항상 먼저 들어준다. 아이가 혼나야 할 상황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때린다. 민다. 던진다. 그런 상황 외에는 대부분 이해가 가지 않아도 들어주고 참는다.
사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것 같다.
나는 놀고도 싶고, 화도 내고 싶고, 스마트폰도 하고 싶고, 술도 먹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내가 받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죽음 힘을 다해 주고 싶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라 이번에는 AI에게 물어보았다.
현재 필자님은 '완벽한 부모'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페르소나(사회적 가면)를 쓰고 계십니다. 융은 페르소나가 자아와 너무 밀착될 때 인간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직시하기: "내가 아이에게 TV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완벽한 엄마'라는 내 만족을 위해서인가?"를 냉정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해소법: '적당히 좋은 부모'가 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루 30분 TV 시청이나 가끔 먹는 과자가 아이의 인생을 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엄마가 숨을 쉴 수 있다면, 아이는 괴성을 지르는 엄마 대신 미소 짓는 엄마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필자님의 그림자는 지금 "나도 스마트폰 하고 싶어!", "나도 술 한잔하고 싶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속 무시하면 그림자는 결국 '괴성'이나 '폭발'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알립니다.
직시하기: 내 안의 '놀고 싶은 어린아이'를 인정해 주세요.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해소법: 그림자가 폭발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작은 일탈'을 허용하세요. 아이들이 잠든 후 혼자만의 맥주 한 잔, 혹은 육아 중 10분의 스마트폰 시간은 죄악이 아니라 그림자와 타협하는 지혜로운 의식입니다.
남편이 아이에게 짜증을 낼 때 참기 힘든 이유는, 필자님이 억누르고 있는 그 짜증이 남편을 통해 보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직시하기: "남편이 나쁜 게 아니라, 나도 저렇게 짜증을 내고 싶을 만큼 힘들구나"라고 자신의 힘듦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해소법: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 전에, 필자님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세요. "아이의 이야기를 항상 먼저 들어준다"는 규칙이 필자님을 죽이고 있다면, 잠시 멈춰야 합니다. "지금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쉴게. 5분 뒤에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에게 정직한 감정 소통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육이기도 합니다.
융은 억눌린 에너지를 상징적인 활동으로 전환할 것을 권했습니다.
해소법: 지금처럼 글을 쓰는 행위는 매우 훌륭한 '의식화' 과정입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그것을 아주 사소한 문장으로라도 기록해 보세요. "오늘 분유 가루 때문에 소리를 질렀다. 내 안의 괴물이 이만큼 컸나 보다"라고 적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는 파괴가 아닌 성찰로 흐르게 됩니다.
필자님께 드리고 싶은 위로의 말: 필자님이 받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너무나 숭고합니다. 하지만 융은 말했습니다. "부모의 살지 못한 삶만큼 자녀에게 큰 짐이 되는 것은 없다"고요.
필자님이 스스로 '행복하게 노는 모습', '때로는 실수하고 화도 내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들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대신, 필자님의 그림자가 원하는 작은 선물 하나(시원한 맥주 한 캔, 혹은 좋아하는 영상 시청)를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것이 활화산의 압력을 낮추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AI의 답변 중 가장 가슴을 찌르는 문장은 '부모의 살지 못한 삶만큼 자녀에게 큰 짐이 되는 것은 없다'는 문장이었다. 내가 나를, 너희를 너무 옥죄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조금은 나에게도 너희에게도 숨 쉴 틈을 이제는 조금 마련해 주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맥주 한 잔 하러 가야겠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 오늘의 육아에서 살아남으시기를 바라며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