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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Jul 18. 2020

사직서를 던지지 못하는 진짜 이유

이성理性의 함정


충동과 감정이 이성에 앞선다


누군가에 대한 끓어오르는 원망과 증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상황을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마치 누군가 나를 어르고 달래준 것처럼 말이다.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책임을 떠 넘기는 상황에서도 당장 주먹을 날리거나 사직서를 던져버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때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완화시켜준 것은 바로 이성理性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성은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성을 도구로 삼아 충동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절제시킨 근본 원인은 내면의 또 다른 충동(감정)이다.


또 다른 충동(감정)이 충동을 억제할 뿐이다

이성으로 은폐된 충동과 감정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심을 억누른 또 다른 충동이란 대체 무엇일까? 개인마다 또 상황에 따라 다르다. 사회로부터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 일 수도 있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은 안락에 대한 강한 충동일 수도 있다. 혹은 상대방에 대한 동정의 충동일 수도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안정에 대한 욕구가 상사에 대한 분노의 충동을 억누르고 승리하면 상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서게 되는 것이다. 사직서는 다시 서랍 속에 들어간다. 물론 분노의 충동이 승리하는 순간 이미 내 주먹은 상사 얼굴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노를 억누른 근본 원인이었던 두려움이나 안정감이라는 충동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충동들은 '팀을 위해, 조직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와 같은 이성적 판단을 전면에 내세운다. 두려움 혹은 안정감에 대한 충동이 분노와 증오심을 물리친 것은 '가족을 위해서'라는 이성을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실제 원인이었던 충동들은 감춰지고 '가족을 위해서'라는 이성이 마치 감정을 통제한 근본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성이 충동이나 감정을 은폐하는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조직이나 업무에 대한 지나친 헌신 뒤에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감춰져 있을 수 있다. 부하 직원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오늘 아침 다른 누군가에게 무시당한 분노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융통성 있고 이치에 맞는 업무 처리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상태 혹은 기분 좋은 감정을 망치고 싶지 않은 충동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하기도 한다. 보고하기 전 상사가 어떤 기분인지 살피는 것이다. 보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상사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상사가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 나왔는지 오늘 사장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는지 궁금해하는 이유다. 


우리가 실제로 행동을 하게 만든 충동(두려움, 열등감 등)은 은폐되고 합리성(팀 화합, 처세술, 냉정한 평가 등)이 외부로 표출될 때 이성은 도덕이라는 왕관을 쓰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행위가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신과 타인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든 충동을 이성이나 도덕으로 은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으로 포장된 행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고통을 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덕이 가지는 폭력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행동 속에 은폐된 충동과 감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성이나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타인에게 강요하지만 실제로는 은폐되어 있는 충동과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성과 도덕으로 포장된 '세상에 통용되는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니체, 아침놀, 책세상 - 109항 및 119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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