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집인데 긴 시 같다. 현실과 환상, 사람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으로도 읽혔다. 김륭은 이 책에서 '동시를 읽는 일'과 '인간다움을 묻는 일', '동시를 쓰는 일'과 '아름다움을 묻는 일'(P6)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동시, 인간다움, 아름다움은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움의 둘레는 환하고 기쁘고 슬프고 고독하다. 어린 날을 베껴 쓰는 이 아름다운 행위에서 난 어릴 때 들었던 벌레들의 소리나 달빛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다. 흉내만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년의 시간은 죽지 않았다. 설령 숨이 멎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라도 불러주면 벌떡 일어나는 게 과거 시간이다. 과거의 시간은 단지 오랜 잠에 빠진 것뿐이다. 어린 나를 불러내어 놀면 나였던 그 아이에게 찌릿찌릿 전기를 선물할지 모른다. 어린 나에게 진정이기는 어렵다.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발바닥에 오르는/전기를 기다릴 수 있게/ <이안.채송화 일부>.(P27) 이안의 시처럼 의자를 놓지 않고 오로지 쪼그려 않을 일이다.
김륭은 동시란 장르가 아이들 속에서 나를 찾아내는 일이며, 그렇게 찾아낸 불구의 나를 건강한 아이로 되돌려놓고 함께 가는 길(P23)이라고 말한다. 불구의 어린 나를 찾아내는 일은 필요할까? 필요하다. 지금의 난 과거의 나를 안고 있기 때문이며 그 아이가 계속 울고 있으면 지금의 난 언제나 슬플 준비가 되어 있어서 작은 일에도 운다.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불러내어 잘 다독이고 함께 울어주어 지금의 나와 같이 사이좋게 걸어가는 길이 동시를 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수많은 서사를 갖고 있다. 그 시간으로 가는 길은 환상의 통로이다.자기만의 환상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꿈과 '죽은 시간'으로 공간화된 기억 속의 억압과 상흔, 시적 개성 또한 드러내는 것(P28)이라고 김륭은 말한다. 환상의 통로로 가는 길은 대상과 섞이기는 일이기도 하다. 경계에서 자꾸만 머뭇거리면 문을 찾지 못하고 실패한다. 어떻게 대상 속으로 들어가 섞이게 될까? 내가 대상이 되는 일 밖에 없다, 대상이 되는 건 바로 진실로 사랑하는 것, 눈과 마음과 귀를 열어 대상을 환대하는 것. 그래야 비로소 그 세계가 내가 되어 시가 생명력을 갖게 될 터이다.
김륭, 《고양이 수염에 붙은 시는 먹지 마세요 》(문학동네, 2021)
고요, 라 무슨 열매 같아요 ~ 아무래도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나 봐요. 이런 땐 제가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P56) 고요, 흐르지 않는 멈춤. 멈춤에서 적막의 시간으로, 적막의 세계에서 골똘. 골똘의 시간에서 나를 알아채면 고요 열매가 달릴까? 나도 바람이면 좋겠다. 여기저기 날아서 냄새나는 것들을 후려치기도 하고 때론 그 안에 머물기도 하면서, 검정 봉다리를 한껏 춤추게도 하면서 말이다.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의 고요가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고독은 늘 저만치 물러나 있곤 한다.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치며 나란히 두고 싶지 않음도 있다. 애써 외면했던 아이들의 고독을 생각해 본다. 내가 먼저 고독에 이르러야 함을 안다. 그래야 아이들의 잘 보이지 않는 마음에도 가 닿을 거 같다. 오직 자신과 맛짱을 떠야 함을 알지만 그 길은 아, 고독하다.
우리 모두의 유년 시절은 씨앗이 잠든 보물창고다.(P156) 동시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되찾는 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순진무구한 세계를 다시 찾는 일은 완전했던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해서 멈출 순 없다. 그 일을 하다니 어느새 그 일을 하고 있다니, 오직 진심으로만 그 보물창고를 열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