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살지만 내겐 한 평쯤 되는 작은 화단이 있다. 화단에는 돗나물이 자라고 괭이밥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화분에도 여러 종류의 식물을 키운다. 키가 큰 아레카야자, 고흐가 사랑했다던 사이프러스, 잎이 근사한 고사리와 살고 있다. 꽃이 피는 화초도 여럿 있다.
식물 집사가 된 건 2년 전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놓고 나서다. 기다리는 시간을 견딜 요량으로 화초를 조금씩 사기 시작했다. 식물이 주는 기쁨은 어마어마하다. 새순이 새로 돋기라도 하면 아기가 첫 발을 뗄 때처럼 호들갑을 떤다.
식물 수가 늘어나면서 화분 받침이 많이 필요했다. 찬장 깊이 잠자던 오래된 접시들이 나왔고, 이가 빠진 접시도 화분 받침으로 충분히 좋았다. 접시는 별안간 찬장에서 바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접시는 좋았을까? 무거운 화분을 견디는 일이 버겁지는 않았을까? 처음엔 다소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피는 날은 그전의 생을 까맣게 잊을 만큼 기쁘지 않았을까?
이 빠진 접시가 화분을 받치고 물구멍으로 나온 뿌리를 토닥이는 일은 우리네 할머니를 닮았다. 윤기 잃은 손이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얼마나 따스한가. 투박한 손끝에서 나오는 음식들은 또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할머니의 온기는 기억으로 남아 다음 세대를 키우는 힘이 된다. 이가 조금 빠진 컵이나 접시는 요즘엔 그냥 쓰게 되었다. 박정완의 시, 홍콩 찻잔 덕분이다. 이 빠진 그릇을 쓰는 것은 할머니의 시간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음식을 담은 일이나 화분을 받치는 일은 서로 닮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식물을 키우는 일도 어쩌면 시 쓰는 일과 같다. 쪼그리고 앉아서 작은 것들의 소리를 듣는 시인처럼 말이다. 시가 잘 써지지 않는 날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접시를 떠올리겠다. 이 빠진 접시의 두근거리는 시간이 나에게도 자주 와서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