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리뷰 후편 (스포일러)

부부 교환일기 by 김쥬둥

by 다슈니와 호돌이


*닫힌 책을 펼치는 조엘

조엘은 이제 빨간 머리 시절까지 돌아간 과거의 기억 속에서 모든 걸 고백합니다. 이 시점에서의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제법 호의적입니다. 당연하게도 둘 사이가 아직 사랑으로 불타오를 시점이니까, 당연한 일이려나요. 라쿠나에 요청해서 널 지우고 있다는 고백에도 클레멘타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담담하게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그만해달라고 해’라던가, (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럼 깨어나!’라면서 말이죠. 조엘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말에 헛소리라며 일축하거나 냉소적으로 무시하거나 냉소적이지 않죠. 비꼬는 태도긴 해도 보란 듯이 눈을 까뒤집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로 잠깐이나마 돌아가긴 하죠. 물론 금세 꿈으로 돌아오고 ‘내가 틀렸다는 걸 밝히는 게 중요한, 조엘표 자기 충족적 예언 아니야?’라며 비아냥거리는 클레멘타인입니다. 조엘은 싸움을 피하고 그녀는 자기가 충동적이라 그렇다며 시무룩해집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며 키스하는 조엘. 기억은 지워지고 있지만, 과거로 갈수록 둘의 관계는 점차 안정을 찾아갑니다.


*닫아둔 이유가 있었다니까!

다음 장면에서 클레멘타인은 소파에서 사랑을 나누는 걸 좋아하는 조엘에게 재차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자기가 없는 기억으로 데려가서 숨자며 말이죠. 거기서 아침까지 버티는 게 어떻겠냐고요. 조엘은 ‘네가 없는 곳은 기억이 안 난다’며 절망하고 클레멘타인은 ‘듣기 좋은 말이지만, 노력해’ 보라고 합니다. 2년이라는 시간을 공유하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함께할 수밖에요. 문득 조엘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립니다. 동요를 부르며 비가 오던 시절의 과거를 소환해 냅니다.

사실 이곳은 그동안 조엘이 숨겨왔던 기억들입니다. 클레멘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던 유약하고 창피한 모습. 엄마 껌딱지에 울보였던 4살 어린아이 조엘의 과거로 초대받은 클레멘타인은 모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너무 과거로 온 부작용으로 조엘은 아이가 되어버렸죠. 엄마가 바빠서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울먹거리고 식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려 합니다. 혼란에 빠진 조엘을 클레멘타인이 다독이는 사이 현실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야밤에 잠든 대표님께 전화해서 불러내기

술과 약에 취해 메리와 관계를 맺은 스탠은 기억삭제가 멈췄다는 걸 뒤늦게 알아챕니다. 지도 바깥으로 사라진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는 메리의 채근에 결국 하워드 박사님을 부르게 됩니다. 자다가 깬 하워드는 조심스럽게 집에서 나오지만, 옆에서 자던 아내가 깨서 그를 바라봅니다. 엉망이 된 조엘의 집을 치우느라 난리가 난 스탠과 메리. 하워드 박사는 메리가 현장에 있는 걸 보고 의아해하지만, 별달리 질책하지 않고 장비를 꺼내 듭니다. 뇌 속의 지도에서 사라진 클레멘타인을 찾기 위해서 말이죠. 동시에 스탠과 메리, 하워드 박사 셋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싱크대, 어머니의 뱃속, 냉혹한 현실로의 출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싱크대에서 평화롭게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클레멘타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말이죠. 그녀가 그토록 지긋지긋해하는 노래. 클레멘타인의 가사가 연인인 클레멘타인이 물에 빠져서 죽고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니, 행복한 도피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기어이 그들을 찾아낸 하워드 박사는 클레멘타인을 지워버립니다. 그녀의 품의 안겨있던 조엘은 싱크대에 빠져 괴로워합니다. 현실에서도 물에 빠진 듯 괴로워하죠. 하워드 박사는 눈을 뜨고 깨어나려는 조엘에게 주사를 놓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잠에 빠져듭니다.


*삼각관계

자동차극장 바깥에서 몰래 훔쳐보는 기억으로 강제로 돌아온 조엘. 물에 흠뻑 젖은 모습이 꼭 양수에 젖어 막 태어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현실에서의 라쿠나 직원들과 꿈속의 조엘이 본격적으로 쫓고 쫓기기 시작합니다. 연출을 통해 조엘의 꿈속과 현실을 오버랩시키며 혼란스러운 관계를 암시하기 시작하죠. 스탠과 연인인 줄 알았던 메리는 하워드 박사가 나타나자마자 그를 존경하다 못해 추앙합니다. 스탠은 화내기는커녕 씁쓸한 표정으로 둘을 애써 무시하고 업무에 집중하려 하고요.

조엘을 뒤늦게 본인이 도망치고 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둘은 손을 잡고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하워드 박사에게 찾아가지만, 그 장소의 주요 이야기는 이미 대부분 지워져 있습니다. 불 꺼진 도시와 서점, 삭제가 완료된 기억 사이를 헤매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을 추적하는 스탠. 하워드 박사는 마무리 됐다 생각하고 떠나려 합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또다시 사라졌다는 얘길 듣기 전까진 말이죠.


*책이 열렸지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클레멘타인의 말을 듣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가는 조엘. 방에서 몰래 자위를 하다가 어머니께 들키는 기억이었습니다. 하지만 금세 들통나고 침대째 몬톡의 바닷가로 갔다가 재차 더 깊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열린 책처럼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던 클레멘타인의 소망을 혼자서나마 이뤄주고 있습니다. 조엘은 죽은 새의 시체를 망치로 내리쳐야 했던 어린 시절로 향하게 됩니다. 친구들에게 겁쟁이라고 놀림받던 조엘은 울면서 망치를 내리치고 클레멘타인이 그를 구해줍니다. 여자친구래요, 라면서 놀리는 친구들에게 대들다가 다 큰 어른의 몸이지만 제압당하는 깨알 같은 슬랩스틱을 선보이는 조엘. 클레멘타인은 울음이 터진 어린아이 조엘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서로 베개를 가지고 얼굴을 누르는 장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장난을 통해 다시 하워드 박사에게 발각되고, 이제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하워드)을 잊고, 세상(메리)에 잊힌 자

둘이 처음 만났던 몬톡의 바닷가에서 눈을 맞으며 뒹구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스탠은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하며, 하워드 박사와 메리만 남겨둡니다. 기다렸다는 듯 메리는 외워둔 명언을 읊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워드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메리는 창피해하면서도 알렉산더 포프의 시를 읊습니다.

‘흠 없는 신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티 없는 마음에 내리쬐는 영원한 햇살이여. 모든 기도가 이뤄지고, 모든 소망을 내려놓는다.’

메리는 충동적으로 하워드에게 입을 맞추고 고백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고. 하워드는 처자식이 있기에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녀에게 이끌립니다. 건물 밖에서는 스탠이 창문으로 보이는 둘의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봅니다. 동시에 하워드 부인, 홀리스가 차를 끌고 도착하고 그녀는 남편의 불륜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맙니다. 스탠이 경적을 울려 뒤늦게 알려주었음에도요. 절망해서 돌아가려는 홀리스에게 하워드가 오늘 잠깐의 실수라고, 메리는 자신이 짝사랑했다고 각각 변명합니다. 그녀는 딱한 표정으로 메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라고 하워드에게 말하고, 메리에게는 하워드를 가지라고 합니다. 너는 이미 가졌었잖아.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떠나는 홀리스.

넋이 나간 메리에게 하워드는 진실을 고백합니다. 이미 둘은 과거가 있었고, 자네가 시술을 원해서 그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말이죠.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의 명언에 따르면 메리는 망각의 복을 걷어차고 다시 하워드 박사와 불륜을 저지른 셈입니다.


*그저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사귀기도 전의 시점까지 돌아와 있습니다. 첫 만남 때 녹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조엘이 도망가버려서 자존심이 많이 상해있는 상태입니다. 아마 그 충격과 분노로 새빨간 머리카락으로 염색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클레멘타인은 불륜이나 양다리는 싫다고 선언합니다. 게다가 남자들은 자신이 완전하다 찬양하고, 자신들을 완전하게 해 주거나 살아 있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라고요. 괜히 짐 떠넘기지 말라는 그녀에게 조엘은 다짐합니다. 한 번 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클레멘타인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기억하라고, 그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삭제됩니다.

현실에서는 새벽에 라쿠나 사무실에 침입한 메리가 자신의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결국 결혼까지 생각했던 과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죠.


*처음 봤지만, 낯설지 않은

조엘은 에이킨 부부와 함께 갔던 몬톡의 해변에 있습니다. 연인인 나오미에게 일이 있어서 혼자 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클레멘타인과 만나게 된 거였죠. 고로 이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최근의 기억부터 역순으로 모든 삭제되었으니 말이죠. 조엘은 그녀가 자주 입는 오렌지색 후드티의 뒷모습만 보고도 눈길이 갑니다. 마찬가지로 클레멘타인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청승맞게 식사하는 조엘에게 다가오죠. 통성명을 한 그녀는 조엘의 치킨 한 조각을 덥석 집어서 가져갑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이죠. 조엘은 불쾌해하기보다 웃음을 터뜨립니다.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이미 연인이 된 것 같다고 했죠. 사실 제법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로맨틱하고 운명적인 만남인 것 같지만,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둘은 이전에도 연인이었고 기억을 기운 게 한 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곳곳에 깔려있습니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싫어하는 노래를 부르고, 어릴 때 아꼈던 허클베리 하운드 인형에 대해 언급합니다. 둘 모두 오프닝 시퀀스에선 모른다고 했던 것들입니다. ‘마법 같은 이름이에요’라는 고백을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때가 됐다고 합니다. 둘은 삭제(이별을 넘어 죽음을 앞둔 이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를 예감하고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 조엘은 담담하게 답합니다. ‘Enjoy it’


*미처 못한 작별인사

둘은 몬톡의 해변에서 밤까지 함께 있다가 비어있는 별장에 침입합니다. 정확히는 밖은 춥다며 멋대로 남의 별장에 무단침입하는 클레멘타인과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조엘입니다. 기억을 지운 후의 만남에서 찰스강의 두 사람과 똑 닮은 모습입니다. 창으로 들어가서 문을 따주는 클레멘타인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동참하는 조엘. 나오미라는 동거인에 대해 알리지만, 클레멘타인은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듯합니다. 우편을 보고 오늘 밤만은 우리가 데이비드와 루스라며 와인을 마시자는 클레멘타인. 그녀가 2층에 옷까지 갈아입으러 간다며 올라가고 조엘은 불안해합니다. 꿈속의 집은 무너져갑니다.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끝나가니까요. 막차 걱정을 하는 조엘에게 그럼 가라고 했던 클레멘타인. 그 말에 움츠러들어서 겁난 아이처럼 작별인사도 안 하고 도망가버린 조엘. 이제 정말로 모든 게 끝입니다.

클레멘타인은 적어도 작별인사는 하자고 제안합니다. 조엘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지만, 그냥 그랬던 것처럼 클레멘타인은 인사합니다. 몬톡에서 다시 보자는 마지막 말과 함께.


*오프닝 시퀀스, 리와인드, 그런데 이제 메리를 곁들인

조엘은 에이킨 부부의 차의 뒷좌석에 탄 채로 집으로, 현실로 돌아옵니다. 기억삭제를 끝낸 하워드 박사와 스탠도 뒤처리를 끝내고 집을 나섭니다. 조엘은 잠에서 깨고 오프닝 시퀀스의 장면이 반복됩니다. 달라진 건 메리와 스탠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는 점이죠. 메리는 퇴사를 각오한 듯 짐을 한가득 들고 회사를 나서고 있습니다. 마주친 스탠에게 자신의 짐이라고 하는 한편 진실을 추궁하지만, 그는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한번 봤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자신이 어때 보였냐는 메리의 질문에 스탠은 답합니다. ‘행복해 보였어, 비밀을 품은 행복이랄까’. 이제 우리는 조엘이 갑자기 몬톡행 열차를 타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좋아했다는 말과 함께 떠나는 스탠이지만, 그가 보지 못한 게 있습니다. 메리의 차량에 가득 담겨있던 라쿠나의 자료와 테이프들 말이죠.


*내가 널 지운 이유

조엘과 밤새 얼어붙은 찰스강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클레멘타인은 빙판에서 넘어져 엉덩이에 남은 흉터를 거울에 비쳐 보고 우편물을 챙겨 나옵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한껏 끌리는 남자. 조엘의 집에 가서 모자란 잠을 잘 계획이죠. 그리고 차량에서 메리 스메보가 보낸 우편을 열어보게 됩니다. 첨부된 테이프에서는 클레멘타인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지루한 남자에다 같이 있으면 화만 내게 돼서 결국 자신 스스로가 싫어진다는, 조엘에 대한 험담이 길게 이어집니다. ‘한심하고 눈치 보는 미소, 상처받은 강아지가 짖는 표정.’ 조엘은 그녀가 자신을 조롱한다 생각하고 차에서 쫓아냅니다.


*내가 널 지운 이유2(더 심한 말)

집에 혼자 돌아온 클레멘타인은 집 앞에서 기다리던 패트릭을 쫓아내고 엉엉 울다가 이내 조엘의 아파트를 찾아갑니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자신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는 아파트 주민. 문이 잠겨있지 않은 조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메리가 보낸 테이프를 듣는 조엘이 있습니다. 역시나 테이프 속에는 클레멘타인을 험담하는 조엘의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유일하게 남은 클레멘타인의 그림을 건네주는데 잠깐은 그녀의 칭찬이 나오는 듯하다가 역시나 험담이 이어집니다. 클레멘타인은 테이프를 끄려는 조엘에게 자신도 들어야 공평하다 합니다. 머리카락 색에 대해서도 험담하자 바로 부정하지만, 내용의 수위가 점점 더 지독해집니다. 위스키라도 함께 마시려 하지만, 스탠과 메리가 거의 다 비워버렸죠. 조엘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잔을 건네며 말합니다. ‘미안해요. 더 있는 줄 알았는데.’ 이는 단순히 위스키가 아니라 둘을 사랑에 빠지게 할 묘약도 다 떨어져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

항상 불안해하고 아무나하고 뒹굴고, 잠자리를 가져서 결국 주변의 모든 사람과 자게 될 거라는 식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결국 클레멘타인은 참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만남도 없이 더 지독한 두 번째 이별을 앞두고 조엘은 그녀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둘은 이미 2년간 만났던 서로의 끝을 들었고 클레멘타인은 결국 우리가 그렇게 될 거라고 합니다. 지금은 모르니까 좋아도 곧 거슬리고, 지루해지고, 지긋지긋해질 거라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그저 이렇게 말합니다. ‘Okay.’ 단순하게 직역하기 힘든 표정과 뉘앙스로 말이죠. 하지만 그 모든 말과 변명, 사랑의 구애를 뛰어넘어 그 한마디가 클레멘타인을 설득하고야 맙니다. 오케이, 오케이. 둘은 울고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몬톡의 해변가에서 눈싸움을 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모습이 짧게, 세 번 반복되며 화면은 하얗게 물듭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몇 번이고 기억 삭제를 통해 이 만남을 반복하고 있다는 암시일까요? 스탭롤과 함께 흘러나오는 Bgm은 Beck의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입니다. 오프닝 시퀀스가 마무리되고 조엘이 차 안에서 오열할 때도 나왔던 음악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배워야 한다’는 후렴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우리는 뭘 배워야 할까요? 사랑일까요, 이별일까요. 아니면 화해하는 법일까요.


*변명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를 읊은 셈이 되었습니다.


*염색 머리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이야기부터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총 다섯 가지의 색상이 등장했죠. 시간 순서대로 Green Revolution, Red Menace, Agent Orange, Blue Ruin입니다. 어린 시절로 데려갔을 때 등장한 Yellow fever까지 총 다섯. 금발을 제외하면 각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보입니다. 클레멘타인의 충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을 나타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시간의 이정표를 알리는 설정입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머릿속을 오가는 스토리다 보니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이 그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죠. 특히 블루 루인은 푸른 폐허라는 뜻인데 기억을 잃은 클레멘타인이 동명의 칵테일을 만들어서 역시나 기억을 잃은 조엘에게 주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참고로 그녀가 커피에도 타 먹고 칵테일도 타주는 봄베이 사파이어는 그 향과 맛의 캐릭터가 강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진입니다. 클레멘타인의 캐릭터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죠.


*라쿠나의 직원들

라쿠나의 직원들과 조엘, 클레멘타인의 서사는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조엘, 클레멘타인의 삼각관계. 홀리스 하워드, 메리의 삼각관계가 그러하죠. 메리와 스탠, 클레멘타인과 패트릭도 마찬가지죠. 이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가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은유 또한 보여주는 듯합니다.


*알렉산더 포프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아마 이 시에서 영화의 착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중세시대에 있었던 유명한 스캔들을 소재로 쓰여진 장문의 시입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작중 메리가 읊는 고백의 대사.

티 없는 신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무구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여

모든 기도가 이뤄지고 모든 소망을 내려놓는구나

발췌해서 보면 흠 없는 마음의 찬양 같지만, 실은 반대입니다. 엘로이즈는 신에게 흠 없는 마음을 바친 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무구한 마음을 신에게 바치는 어린 신녀들을 보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이뤄지려면 인간으로서의 모든 소망을 내려놔야 합니다. 평화 없는 사랑을 선택할지, 사랑 없는 평화를 선택할지. 정답은 없지만, 엘로이즈의 마음속은 평생 아벨라르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고, 그렇기에 평화가 아닌 고통과 지옥 같은 번뇌에 갇혀 지냈던 것이죠.

여기서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은 그녀를 구원해 주기로 합니다. 기억 속의 가득한 흠결, 그러니까 아벨라르를 지워주면 그녀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라쿠나를 설립해 그녀의 기억을 지워줍니다. 처자식이 있다는 점만 빼면 어린 여자와의 나이 차이와 학식, 금지된 사랑 등등, 존경받던 신학자 아벨라르와 하워드 박사의 유사성이 느껴집니다. 그를 사랑하지만, 괴로워하는 메리와 엘로이즈 또한 마찬가지죠. 영화에는 빠졌지만, 시나리오 상에서는 메리가 하워드 박사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벨라르의 아이를 가졌던 엘로이즈의 모습에서 메리를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겠지요. 게다가 평생 아벨라르와 주고받은 서간을 남긴 엘로이즈와 기억이 삭제된 모든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메리. 꼭 똑같다고 할 순 없어도 재미있는 연관성이 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미셸과 찰리의 사고실험에서 메리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둘은 한발 더 나아가기로 한 듯합니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사랑에는 사실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 같은 것들 말이죠. 비록 2년이라는 시간 속에 서로의 사랑이 지긋지긋함으로 변질되고, 좋아하게 되었던 그 모든 이유가 고스란히 증오하는 이유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을 뿐이죠. 그렇기에 둘은 절망합니다. 반대로 꼭 만나야 할 이유 따위도 없기 때문이죠. 시간의 파도 앞에 허물어질 모래성을 쌓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심지어 그 시간들이 고통과 괴로움, 지루함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사실 라쿠나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일종의 리버스 선악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무지했던 상태가 되어 영원한 햇살 속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에덴동산으로 회귀시켜 주는 겁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듯 클레멘타인이 먼저 기억을 지우는 선후관계도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태아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 인간의 어설픈 라쿠나적 시도는 무위로 돌아갑니다. 에덴동산의 뱀 역할을 하는 메리가 꼭 테이프라는 이름의 선악과를 주지 않았어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같은 결말에 또다시 도달했을 테니까요. 다시 서로에게 지긋지긋해지고 상처를 주고, 가짜 에덴동산에서 다시금 쫓겨나고야 말았겠죠.

그럼 클레멘타인과 조엘에게 영원한 햇살은 없는 걸까요? 당연하게도 그렇습니다. 흠결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듯, 결국 모든 인간은 정해진 결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티 없는 신녀가 되어 영원한 햇살을 누리려면, 우린 인간으로서의 모든 소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한다는 건 곧 선악과를 먹기 전의 무지한 상태로의 희구일 뿐입니다.

정답도 진리도 없겠지요. 그저 우리는 흠결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열린 책처럼 때로 상처를 공유하고, 결국 나빠질 걸 알면서도,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자리여도 ‘Okay’입니다. 뒤로 가더라도 괜찮아요.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서

수명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랑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 겨울의 이미지가 주를 이룹니다.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서 물놀이가 아니라 눈싸움을 하고, 꽁꽁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 누워서 별을 바라보죠. 곳곳이 깨지고 금이 가버린 찰스강 위에 드러누운 조엘과 클레멘타인. 조엘의 차는 우그러지고 클레멘타인은 넘어져 멍이 들어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봄이 오면 얼음을 녹을 겁니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 다시 얼어붙은 사이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또 이렇게 얼어붙은 마음 위에 드러누워 별을 바라보는 수밖에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함의와 철학, 추상이 넘쳐나는 이터널 선샤인. 언제고 또 보게 되길 바랍니다. 근거 없는 제멋대로 리뷰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이제… 마지막이야,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듣게 된다면

조엘의 대사를 인용해야겠네요.

“Enjoy it.”

그냥 음미하자.


리뷰를 몇 날 며칠을 써버린 김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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