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호돌이
첫 문장을 쓸 때는 언제나 고민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할까요. 순백의 새하얀 백지를 마주봅니다. 그 무엇도 정하지 않은 채로 날짜와 요일을 적어봅니다.
2025년 12월 1일 월요일.
쓰고 나니 의미를 부여하기 좋은 숫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 12월. 심지어 그 첫 번째 날인 동시에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알맞은 날이랄까요. 짝짝짝.
일기를 쓰려니 문득 궁금증이 생깁니다. 교환일기는 어째서 편지가 아니라 일기여야 했을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편지는 소식을 적어 보내는 행위, 어떻게 보면 수신인이 있는 글. 보여질 것을 전제로 한 글쓰기겠죠.
다만 일기는 대체로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은 글쓰기. 그래서 더 은밀하면서도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교환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적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글쓰기라. 참으로 어려운 명제입니다. 이럴 때 꺼내기 좋은 건 역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과거를 더듬는 것이겠지요.
20여 년의 시간들 중에 어떤 이야기를 꺼내 들어야 다슈니의 허를 찌르면서도 적당한 위트를 선보이고, 동시에 뛰어나고 세심한 기억력을 선보여 감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높은 이상과는 달리 머릿속에서는 뻔하고 흐릿한 기억들만이 회색 먼지처럼 굴러다닐 뿐입니다. 평소에 틈틈이 메모나 일기를 적어두지 않은 게으름을 원망할 수밖에요.
어쩔 수 없이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서술하기로 합니다. 때는 2005년, 상반기. 주말, 또는 평일 저녁에 선유도 공원을 함께 갔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은 선유도에서 야외 클래식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러 간 건 아니었지만, 마침 공연이 있으니 행운이었달까요. 홀은 따로 없으었나 한층 아래에서 연주하고 있었기에 위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틈에 서서 현악 4중주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었습니다(또는 3중주, 아니면 5중주, 사실 기억이 잘 안납니다). 야외에서 듣다 보니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더군요. ‘뭔데 이렇게 모여있어?’, 남자와 연인으로 보이던 여자가 ‘공연하나 봐 보고 가자’, 라며 붙들었습니다. 하필 다슈니와 내 옆에 선 남자는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습니다. ‘별것도 아니구만! 재미도 없네!’. 그런 생각이야 할 수 있지만, 굳이 연주하는 분들께도 들릴법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니 저까지 불쾌해졌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남자도 제 시선을 느꼈는지 절 마주보았습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남자였습니다. 저처럼 비리비리한 인간은 가뿐하게 때려눕힐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뭘 봐?’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물어왔습니다.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말없이 계속 보았습니다. 제 딴에는 야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좋은 문화 공연을 망치는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항의였습니다. 그저 말없이 쳐다보는 것. 겨우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마구 뛰다 못해 관자놀이까지 북처럼 둥둥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남자의 욕설을 들으며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요. 영원같이 느껴졌지만, 아마 실제로는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겁니다. 폭언을 내뱉는 남자를 여자가 질질 끌고 사라지기까지는요. 혹시라도 얻어맞을까 싶어서 잔뜩 긴장한 얼굴이 풀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이어도 저는 같은 행동을 하려나요? 아니면 달라졌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안 맞아서 기쁜 호돌이